한줄 詩

내 마음 기우는 곳 - 박경희

마루안 2020. 3. 21. 19:39

 

 

내 마음 기우는 곳 - 박경희


안녕리에 가보면 맥없이 솟아 있는 기둥이 여러개
모두 이별한 것이다
만남도 헤어짐도 안녕리에서는
뽀얗게 먼지 뒤집어쓰고
쓸쓸히 엉덩이를 기다리는 툇마루이다
무거운 발걸음 속 달라붙는 그림자
깨진 기왓장이 끌어안고 있는 빛 잃은 알전구와
덩그러니 빈집 마당을 지키는
구멍 환한 항아리
버석거리는 나무 기둥이 나이테를 놓은 곳이다 때론,
사선으로 잘려나간 대나무 끝에
가슴을 다치기도 한다
내 마음 한 자리 빗금으로 내려앉아 우는 사내
대숲이 일렁이는 곳에서 바람 부는 쪽으로
내 마음 기우는 것도
짧은 대나무 마디로 살다 간 사내의 빈 곳이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화성시 안녕리에 가보면
처마 끝 밑구멍 환한 목어가
바람가는 곳으로 몸통을 두드리고 있다
뽀얗게 먼지 뒤집어쓰고
쓸쓸히 엉덩이를 기다리는 툇마루가 있다

 

 

*시집,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창비

 

 

 

 

 

 

바라보다가 문득, - ​​박경희


​​갈바람이 흰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새 날아간 자리 가지처럼 파르르 눈동자 떨리던 사람
바스락거리는 별을 끌어다가 반짝, 담배에 불붙이던 사람
산등에 걸린 달을 눈으로 담은 사람
흙 파인 돌계단에 앉아 찬찬히 처마의 달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벼 바심 끝난 논바닥에 뒹구는 바람을 끌어다가
옷깃 안으로 여미던 사람
문득, 돌아선 곳에서 나를 달빛 든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

​그 사람

바라보다가 고라니 까만 눈으로 바라보다가 잡으려 하니
그 자리에 별이 스러졌다

 

 

 

# 박경희 시인은 2001년 <시인>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벚꽃 문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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