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빈 간장독을 읊다 - 고재종

마루안 2020. 3. 19. 22:15



빈 간장독을 읊다 - 고재종



새털처럼이나 많은 날들이
세운 무릎 끌어당겨 얼굴을 묻고
둥그런 흐느낌 하나로
모일 때가 있다


어긋나고 어긋나도 한참을 어긋나서
남몰래 막다른 길로 서면
이목구비는 닫힌 채
텅 비어 버리지


사는 일이 뼈에 저며 쓰라려도
정인처럼 사무치는 것도 삶이더니


그 내력이 이젠 천연함에 닿은 듯한
둥그런 텅 빈 절규에
끝내 답이 없다



*시집, 고요를 시청하다, 문학들








세상이 머니 나도 비어 - 고재종



앞집 은행나무 가지 사이의
빈 까치집만 바라보다가
툇마루 끝에 볕살 들어 그 품에 앉는다
삭풍에 전신줄은 잉잉 울고
동지의 하늘만 공색(空色)하더니
볕살 속, 찐 고구마 몇 알 삼키며
무슨 마음도 하나 없다
볕살이 따스하니 웅크린 어깨가 풀리고
작정한 바 없이 낸 마음들
머무는 바 없이 떠나간다 할까 보다
쓰잘데없는 광고지만 갖다주는
우체부는 무어라고 말할까
이따금 개가 짖으니 적막을 알 뿐
뒷산 봉우리는 한층 더 끼끗하다
한 시절의 요약 같은 그리움으로
한 시절을 빛냈다면, 다만
볏짚처럼 삭은 뒷집 할머니가
장작불을 어찌 메우냐고 묻지는 않으리
이제는 시방도 한참도 없이
세상이 머니 나도 비어
볕의 살을 만지는 것으로 참 좋다






# <세상이 머니 나도 비어>라는 제목이 참 가슴에 와 닿는다. 이전에 발표한 <그리움의 유폐>를 개작한 작품인데 훨씬 담백해졌다. 과거 현재 미래 중에 바뀌지 않는 것은 과거뿐이라던데 옛 것을 불러내어 사라진 풍경을 돌아보게 만든다. 영어에 오염되고 있는 우리 말에 대한 시인의 애정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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