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의 여유 - 최정
추락하기 직전
날개 돋는 기적 같은 삶이란
가능한 일인가
눈길 오르막에서
트럭은 정비소에 맡겨졌다
뜻하지 않게
강원도 산중에서 일주일이나 더
발이 묶였다
그러고 보면 내 인생도
뜻하지 않게 여기까지 굴러왔다
한쪽 뒷바퀴가 남겨준
낭떠러지 한 뼘의 짜릿한 여유를
이제껏 모르고 살아왔다
잠시 미끄러졌을 뿐인데
벼랑으로 밀려날까 두려워
미리 겁먹었다
슬쩍 눈 감고 살았다
*시집, 푸른 돌밭, 한티재
돌탑 - 최정
하고많은 땅 중에
돌밭 주인이 된 것은 숙명일지도 몰라
농사의 시작은 끝을 치르는
나만의 무슨 중요한 의식처럼
또 큰 돌을 주워낸다
돌을 주워낼 때마다
왜 무작정
속죄하는 마음이 드는 걸까
먹고살겠다고
이 땅에 흘린 허물
주워 담는 기분이 드는 걸까
차갑고 모난 돌들도
서로 등 비비고 모여 있으면
모난 귀퉁이 둥그러질지도 몰라
한 십 년쯤 농사를 짓고
한 십 년쯤 돌을 주워낸다면
모난 귀퉁이 아프게 깎여
내 안에 어리석도록 투박한
둥근 돌탑 하나 쌓을 수 있을지도 몰라
# 최정 시인은 1973년 충북 중원 출생으로 인하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시 창작 모임 <뻘>, 동인 <매립>에서 활동했다. 시집으로 <내 피는 불순하다>, <산골 연가>가 있다. 현재 경북 청송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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