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먼 항구를 그렸던 그림 - 정윤천

마루안 2020. 3. 15. 22:15

 

 

먼 항구를 그렸던 그림 - 정윤천

 

 

불쑥불쑥 나타나 팔짱을 걸어 주고 하였던 아이는 외가 쪽의 먼 피붙이였다 별들이 이마 위로 가장 가까이 내려앉은 계절이었다 외가 마을의 미루나무 너머로는 내가 살폈던 목측(目測)의 한계보다 먼 데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산딸향이 들켜오던 저녁이 오고 있었다 아이에게 건네주어야 할 그림의 제목을 정하여 나온 날이었다 아이의 눈 속으로 등대의 불빛 같은 눈물별이 하나 지고 있었다 아이는 내 그림 속에 그려진 그림의 내용을 물어 주었다 항구와도 같았던 데를 그려 넣었던 그림이었기에 항구가 그려진 그림이라고 일러주었다.

 

 

*시집, 발해로 가는 저녁, 도서출판 달을쏘다

 

 

 

 

 


근황 - 정윤천

 

 

맹물에 국수를 말아먹은 과거가 있다 국수의 추억은 가늘고 밍밍하여 팔리지 않는 요즘의 시집들과 닮았다 시집을 물에 풀어 삼키면 국수 맛과 같을 것 국수는 끼니가 될 수도 있었지만 시집에는 좆 같은 성분이 담겨 있어 어떤 맛은 심한 불면에 들게도 한다 그런 날은 말린 은행잎 같은 것으로 신서정의 궐련을 제조해도 되겠다는 아름다운 계획을 노트에 옮겨보기는 하였으나 은행잎에 비친 비애의 기척과 함께 청춘의 일부를 멋대로 말아 피운 행적이 물들어 있어 새 궐련의 특허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혼자만의 기우에 빠져보기도 한다 궐련의 이름부터 지어 놓고 보았던 무대뽀의 심경인들 지나간다 "우수와 방황과 시의 냄새" 왕년 베스트셀러 부류의 시집 제목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 같기는 하였으니 나중에라도 궐련 재벌이 될지 모른다는 벌통 같은 희망을 간직해 보기는 하지만 갑골문 같은 내 문장들에서 한시바삐 발목을 빼내야 하리라는 목하 고민 중인 표정도 지어 본다 여기쯤에서 폐시하는 문제도 고려해보아야만 한다 ‘앞트임’을 했다는 여자의 눈매 사진이 카톡 속으로 천안함도 궁금해하는 어뢰처럼 발사되어 오더라도 마땅치 않은 심정을 들키지 않아야 하였으므로 나름대로는 일로매진 중인 척은 해주고 있어야만 한다.

 

 

 

 

 

# 정윤천 시인은 1960년 전남 화순 출생으로 1990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과 1991년 계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흰 길이 떠올랐다>,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 <구석>, <발해로 가는 저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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