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매화, 풀리다 - 이은규

마루안 2020. 3. 15. 22:25



매화, 풀리다 - 이은규



겨울의 뒷모습과 매듭을 잊은 시간으로부터


나는 오늘 상춘객, 꽃 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아직 차가운 손끝 혼자의 나들이 물어물어 찾아간 청매홍매야 내 마음이 들리니 목소리가 들리니 봄의 입김으로 풀리는 살갗이 환하게 아프겠다, 아프지 않겠다


누군가 날 생각하면 신발끈이 풀린다는 말


눈뜨면 아프기도
눈감으면 아프지 않기도 하니까
매일매일 멀리서 가까이서
오래 꿈꾸던 문장을 우리 이제 매듭짓기로 하자
청실홍실의 상상력, 몹쓸


한 발 한 발
저 매화를 다 걸어야 하는데
오늘따라 신발끈이 자주 풀리는 이유
누군가의 생각을 짐작하겠다, 짐작하지 못하겠다


먼 곳에 닿을 꽃과 안부


언젠가 대신 신발끈을 매주며 함께 있는데도 풀릴 만큼 좋아, 묻고 답하던 날 마지막 꽃에 귀기울이면 그날의 목소리 돌아올 거라 믿습니다 모든 나무에게 꽃이 그렇듯 함부로 피는 사랑이란 없다 잘못 매듭지어진 시간이 있을 뿐


단단한 다짐이 필요해
기억이 저무는 사이 서성이는 상춘객
주머니 속 숨겨놓은 꽃향기
한 사람에게 닿을 텐데, 닿을 것만 같은데



*시집,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문학동네








봄이 달력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 이은규



꽃봄을 줄게, 봄꽃을 다오
중얼거리는 사이 저만치 기억이 오고 있다


경고에 가깝거나
안내보다 먼 문장들에 오래 머뭇거리는


꽃잎 한 점 떨어져도
봄빛은 줄어든다, 속삭이던 목소리는 이제 없다
투명하게 웃는 얼굴들이 희미해지는 동안
안 보이는 발자국을 따라 길을 나서면

때로 어떤 순간은 영원이 되고
끝나는 듯 시작되는 길 위, 우두커니
무심코 지나친 풍경이거나 놓쳐버린 시간


저기 어떻게 흩날려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고요하게 흩날리고 있는 점점의 벚꽃들이
사이드미러 풍경 안에 고여 있다
그 시간 속에 씌여 있는 한 줄 문장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기억은 언제나 우리를 앞지르며 도착해 있다
봄이 달력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모든 봄은 지난봄을 간직한 채 피어오르고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지 말라


경고에 가깝거나
안내보다 먼 문장들에 머뭇거리지 않기 위해
이제 우리는 지난 사건을 발견하며
그 사건으로부터 뒤돌아보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러니 봄꽃을 줄게, 꽃봄을 다오
저만치 기억이 오고 있다 선언하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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