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늘을 접어 날리다 - 김정경

마루안 2020. 3. 7. 19:23



그늘을 접어 날리다 - 김정경



이른 아침 쫓아 나가 남편의 지갑을 뺏어 들고 돌아온
아래층 여자가 대청소한다
방 안에 갇혀 지내던 화장대가 마당으로 불려 나왔다
막막한 표정으로 서있다


주말 앞둔 밤
느닷없이 아래층 안방 문이 열리고
아버지 다 봤다니까요 오토바이 뒤에 타고 있던 그 여자!
군자란 화분이 뛰쳐나왔다
나잇값 좀 하세요, 재떨이가 화장대 거울을 들이받았다


신발장에서 쫓겨난 신발들이 속까지 흠뻑
젖는 줄도 모르고 물청소하는 주인 여
나는 널어놓은 이불을 고쳐 너는 척하면서
그늘을 접어 그녀 쪽으로 슬쩍 날려 보낸다


세탁기에서 옷가지를 꺼내 든 그녀의 옆구리에
식구들 팔다리가 영영 풀리지 않을 것처럼 엉켜 있다



*시집, 골목의 날씨, 천년의시작








다이아몬드 더스트 - 김정경



눈이 촛농처럼 녹아내린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왔을까
여행 가방에서 짐을 꺼내자 위경련이 찾아왔다
내가 나쁜 애라서 아픈 거라고 믿었던 어린 날
머리맡에 놓인다
잠들지 않기로 한 이 밤, 하늘은
작은 결심들로 빛나는 일기장 같고


영하 2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길 기다려
숲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종아리를 삼키는 눈길 열어젖히고 산등성이에 올라
손전등 들고 허공을 더듬겠지
별을 잘게 빻아 공중에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인다는 다이아몬드 더스트
얼어붙은 수증기가 만드는 숲속 오로라


숨기듯 숨어든 사람 하나 멀리서도 보일까
먼지처럼 떠도는
어둠 속에 마음을 오래 켜두었지만
꽁꽁 숨겨 두고자 했던 것부터 먼저 탄로 났다
생활의 남루와 이별의 기척 같은 것,
눈부시게 환해지기도 하려나


차갑게 식은 초승달이 이마를 짚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