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이라 불리운 남자 - 김남권

마루안 2020. 3. 3. 22:03

 

 

봄이라 불리운 남자 - 김남권

 

 

젖은 장작 냄새가 난다

그가 오고 있나 보다

포실 포실한 흙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고

아궁이에선 벌써 불 냄새가 한창이다

그는 불을 품고 있다고 했다

강원도 산골에 산다는 그는

한여름에도 불이 좋다고 했다

그는 계영배를 구울 때처럼

생의 마지막에 스스로 만든

아궁이 속으로 기어 들어가

막걸리 사발 하나를

구울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가지 취 냄새가 난다고 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화전민의 유전자 때문이라고 했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발가벗고

산으로 들어가

온 산을 불 지르고

그 불 맛을 실컷 퍼먹고

나서야 정신이 든다고 했다

그는 봄마다 진달래와 얼레지로 정액을 만들고

산을 내려온다

바람 속에서 도끼를 입에 문 장작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드디어 옷을 벗고 그를 맞이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시집, 발신인이 없는 눈물을 받았다, 시산맥사, 2019년 8월 발행

 

 

 

 

 

 

자장가(自葬歌) - 김남권


말을 못하는 새가 있다
날개가 퇴화되어 스스로 위리안치된
알바트로스처럼,
사방이 절벽인 절해고도에서 뜬눈으로
풍장을 기다리다 머언 먼 기억의 바람을 한 입 깨물었다
한 움큼의 뜨거운 말조차 남아 있지 않은 지상에서
날개가 펴지지 않는 치욕의 밤을 보냈다
달의 숨소리조차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어둠이 스스로 침묵하는 동안
날개는 점점 퇴화되어 몸을 기다리는 바위에
시간의 무늬가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새의 언어가 닫히기 전, 하늘은 어두워지고
바람은 뜨거워졌다
다시 천 년을 날아서 우주의 어느 귀한 분을
만나고 돌아와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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