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릉역의 추억 - 박일환

마루안 2020. 3. 3. 19:35



사릉역의 추억 - 박일환



-뒤따라오는 ITX 청춘열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3분간 정차하겠습니다
차내 방송을 듣는 사람들의 표정이 묵묵하다
아무렴, 앞질러 가는 청춘의 특권을 위해
언제든 양보할 자세를 갖추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


마석역까지는 앞으로 세 정거장


사릉에는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가 묻혀 있다지
여든두 해 동안
오로지 단종만 생각하며 살았대서 사릉(思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지


청춘열차를 앞서 보낸 전동차 밖으로
가는 봄비가 내리고, 흐릿하게 젖은 풍경을 끌어안은 채
서러운 죽음과, 죽은 이를 잊지 못하는 마음이 빗방울로 아롱진다


역사는 앞질러 간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그러니 나는 지금 역사를 뒤쫓고 있는 중이다
천천히 가다 보면 마석 모란공원
비 맞고 서 있을 묘비 앞에 도착해 잠시 묵념을 올릴 것이다


내가 여든두 해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잊지 않으며 사는 일의 중요함을 잊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봄비 그치는 날
무덤가 진달래는 나 몰래 필 테고, 피었다 질 테고
나는 잠시 청춘열차를 앞서 보내던 사릉역을 떠올리고는
열일곱 단종의 나이를 헤아리다
모든 앞서간 청춘은 슬픈 것이라고 뇔지도 모른다



*시집, 등 뒤의 시간, 반걸음








2월이 짧은 이유 - 박일환



빨리 겨울을 끝내고
봄맞이하러 가자는
당신의 꼬드김에 그만
꼬리를 잘라버렸습니다


잘려 나간 꼬리가
분해서 꽃샘처럼 이르러 가는 동안
봄이 어디 와 있나
두리번거리곤 했습니다


바보처럼 해마다
꼬리를 잘라버리고 찾아 나선 봄은
봄봄거리며
저 혼자 잘난 체하느라 바빴고


봄꽃이 질 때쯤에야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잘려 나간 꼬리는
다시 돋아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움이란 말을 알게 된 게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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