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쓸쓸한 나라의 씁쓸한 - 김형로

마루안 2020. 3. 9. 22:02

 

 

쓸쓸한 나라의 씁쓸한 - 김형로


혼자 먹는 밥은 동굴만큼 어둑해서
밥 한술에 국물 한술
내 몸의 기나긴 울력은 갈상갈상하다

동탯국은 맛있었던가
자작한 국물, 마저 마시려 기울이다 미끈,
내 입에 부딪힌 또 다른 입 하나

순간 본, 우멍한 구멍

얼었다가 끓었다가 육신은 이산(離散) 하고,
아직 볼 것이 남아 있다는 눈인가
닫지 못한 입과 쓸 만한 이를 번득이며 다가온,
검고 긴 한 생의 입구

그 입들, 먹고 산 구멍들,
그 어둑한 허기들,
너너 나나 한줄기 컴컴한 생이라는

쓸쓸한 나라의 씁쓸한,


*시집, 미륵을 묻다, 도서출판 신생

 

 

 

 

 

 

부전동에 가시거든 - 김형로


조심하세요 그곳에는 산전수전 고수들이 많습니다
짜장이나 짬뽕 한 그릇 시켜놓고 소주 한 병은 뚝딱!이지요
밥과 안주의 경계를 허무는 형님들
아랫턱 거동을 보아하니 틀니 수월찮이 했을 것 같은데
술은 한 잔씩 딱, 딱 텁니다
꿀꺽 꺾어 넘기는 목젖 힘차고
굵은 흉터 두엇 적힌 팔뚝에는 핏줄이 실하게 뛰지요
술 한 잔에 후루룩 면 한 입
꾹꾹 씹는 무심한 눈매가 혼술밥의 달인입니다
소싯적에는 삼십도 쐬주 댓병으로 마셨다는,
아직도 황혼의 명불허전들
짜장면 이천 원, 술 한 병 이천 원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에
또 하루를 지웁니다
찬물에 우물우물 입을 헹구면 반세기 지난 유행가가
늙은 과부 허리 홀리듯 흘러나오고
지하철 공짜 인생 흔들흔들 가십니다
혹시 부전동에 가시걸랑
주먹도, 돈도, 인물도, 아무것도 자랑하지 마셔요
조용히 전집이나 국밥집에 들어가
얼굴마다 역사요 주름마다 신화인 장군들의
달빛 같은 훈장을 가슴으로 볼 일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아무나 알아볼 수 없는 무명의 그 약장(略章)들을요



 

# 김형로 시인은 1958년 경남 창원 출생으로 부산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2017년 <시와표현> 신인상, 201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등단할 때는 본명인 김형수였으나 시집 낼 때는 필명 김형로가 되었다. 아마도 동명의 시인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부산일보, 경향신문 기자를 지내다 뒤늦게 시인의 길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