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작별 일기 - 최현숙

마루안 2020. 3. 7. 19:16

 

 

 

구술생애사 최현숙의 책이다. 아니 작가라고 해도 되겠다. 구술생애사라는 직업을 세상에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 남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것을 책이나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알리는 직업이다. 그의 바탕은 어떤 차별도 없는 세상이다.

이 책은 최현숙 작가의 어머니 이야기다. 여든 여섯의 어머니가 치매를 앓다 세상을 떠나는 과정을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했다. 진작에 그의 책을 몇 권 흥미롭게 읽었기에 애초에 이 기록은 책으로 낼 작정으로 쓴 글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글도 흡인력 있게 아주 잘 쓴다.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이 여러 군데다. 거기다 솔직한 표현이 맘에 든다. 자기 엄마 얘기를 꾸미거나 과장이 없다. 되레 숨기고 싶은 집안 사정과 일찍부터 생긴 반항심으로 아버지와의 갈등 노출이 감동을 준다.

 

잘 나가는 소설가의 빼어난 문장력으로 써 내려간 대하 소설도 그저 꾸민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어떤 책보다 진솔한 글이다. 거북한 가족사까지 까발리는 솔직함에 독자는 감동을 받는다.

반면 작가의 가족들은 다소 불편해 할 수도 있겠다. 작가는 다섯 남매 중에 둘째이면서 큰 딸인데 교양을 갖춘 중산층의 전형을 보여주는 남매의 우애도 아름답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데 마지막까지 형제애를 발휘하는 아름다운 가족이다.

작가도 책에서 언급하지만 돈이 많지 않은 가족이었다면 가족의 불화가 있었을 것이다. 작가의 어머니는 생활력 없는 남편과 달리 사업 수완이 밝아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실버 타운에 들어가기 위해 2억의 보즘금과 4백 만원에 가까운 생활비를 매달 냈다.

<돌봄 서비스, 친절, 덕담 등이 돈을 매개로 거래되는 이 실버산업 현장에서 타인들이 평가하는 핵심 잣대는 남은 건강과 죽음까지의 시간이다. 고령사회에서 존재 자체가 문제시되는 빈곤 노인들과 달리 '있는 노인'들은 쓸모가 많다. 그들은 아낌없이 쓸 줄 아는 소비자이자 납세자이다. 

노동력이나 출산을 통한 생산자로서의 쓸모는 없어졌지만 가진 돈 덕에 이 노인들의 늙음과 질병, 죽음은 아직 자본주의적 쓸모의 영역에 있다. 실버산업과 의료 산업은 구매력 있는 노인들이 오래 살고 건강이 안 좋을수록 돈을 번다>.

작가의 어머니는 실버 타운에서 비교적 풍요롭게 노후를 보내다 여든 셋 무렵부터 치매 증상을 보인다. 돈밖에 모르고 살면서 평생 생활력 없는 남편을 미워하며 살았는데 마지막은 남편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다. 작가의 아흔 살 아버지 또한 전립선비대로 소변주머니를 차야 했고 청력을 잃어 필담으로 자식들과 소통한다.

치매 가족들의 공통된 경험이겠으나 작가의 어머니도 가족들을 힘들게 하면서 조금씩 죽음에 가까이 간다. 아내의 병치레를 돕던 아버지도 처음엔 "너그 엄마 오래 못 살 것 같다"에서 "너그 엄마가 쉽게 죽지를 않는구나"로 바뀐다. 헤어짐에 대한 염려에서 저런 상태로 오래 살 것 같은 걱정으로 변한 것이다.

 

<죽음은 순간이다. 문제는 늙어 죽어 가는 과정이다. 엄마가 그 과정을 이제 마쳐도 좋겠다는 생각을 오늘 했다. 전에도 했던 생각인데, 오늘은 더 진지하게 했다. 늙어 죽어 가는 사람을 이 병원 저 병원 모시고 다니는 일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무의미하고 번거롭고 무례하며 무력감을 느낄 일인가를 생각했다>.

 

작가는 어머니의 말년을 겪으면서 사람이 세상에 나올 때는 자기 의지가 아니었지만 떠날 때는 자기 의지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구나 늙음을 두려워한다. 늙는 것이 무서우면 일찍 죽거나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작별 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