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김시종, 어긋남의 존재론 - 이진경

마루안 2020. 3. 12. 19:28

 

 

 

이 책을 읽고서 김시종이란 시인을 다시 보게 되었지만 저자인 이진경 선생도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일전에 그의 책을 읽기는 했어도 큰 관심은 없었다. 저술 활동에 열심이고 늘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정도였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그리고 교수, 거기다 꽤 많은 책을 냈다. 매년 두어 권을 낼 정도로 왕성하다. 그의 책을 다 읽어보진 않았으나 호기심 가는 책이 여러 권이다. 책 읽기에 게으른 사람이라 어쩌면 다른 책은 입맛만 다시다 지나갈 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사회학자에게 시인이 눈에 띄었을까. 일본어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문학 평론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내가 이진경 선생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예전에 김시종 시집을 읽고 나서다. 시집 <잃어버린 계절>의 번역자가 이진경이다.

 

김시종 선생의 시도 좋았지만 어떻게 이런 시집을 번역한 사람이 철학자인지가 궁금했다. 이진경은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김시종을 동아시아 최고 시인 중 한 명이거나 현존하는 일본의 최고 시인 중 하나라면서 아무나 전설이 되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내가 그렇게 김시종의 시에 휘말려 들어간 사건의 기록이다. 그의 말들에 사로잡힌 채 따라갔던 곳을 탐색하여 그린 하나의 地圖다. 내가 경탄했고 감동했던 풍경들로 다른 이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시도이고, 그로부터 다른 풍경들이 탄행하기를 소망하는 기다림이다>.

 

대단한 찬사로 시작하는 이 책은 김시종의 작품 세계를 철학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이런 류의 책이 금방 지루해지기 십상이라 앞 부분 읽다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마지막 장까지 김시종의 시 세계로 푹 빠져들게 만든다.

 

김시종 시인의 인생이 소설적이긴 하다. 해방 후 제주에서 일어난 4.3 항쟁에 가담했다가 죽음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해 지금까지 70년을 일본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근래 한국 국적을 취득하긴 했으나 여전히 재일 조선인으로 살고 있다.

 

김시종 선생은 1929년 출생이니 연세가 구순이 넘었다. 그동안 8 권의 시집을 냈다. 90년이 넘은 생애에서 보면 그리 많은 양은 아니다. 이진경은 어느 날 시인의 시를 접하고 점점 빠져들어 이런 책까지 내게 되었다.

 

나는 김시종 시인의 시집을 전부 읽지는 못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인용시로 시인의 시 세계를 가늠하기도 하면서 읽었다. 책 제목인 어긋남의 존재론이란 결론도 참 적절했다. 내 살아온 날들이 어긋남의 연속이었기에 더 그럴 것이다.

 

선생은 1945년 조국이 해방 되는 날부터 어긋남이 시작되었다. 그는 해방 때까지 한글을 모르고 일본어로만 공부한 황국 소년이었다. 그 어긋남이 시인의 바탕이 되면서 사는 이유이기도 했다. 첫 시집 <지평선>에서 마지막 시집 <잃어버린 계절>까지 이진경은 시인이 어긋남으로 존재했던 세월을 차례대로 소환한다.

 

모든 인생이 그렇듯 씻김굿에서 고풀이 하듯 시원하게 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태 없었던 김시종 시의 유일한 해부다. 내가 전설로 생각하는 백석도 아니고, 윤동주도 아니고, 서정주도, 김수영도 아닌 김시종의 시 세계를 이렇게 깊이 다룬 책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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