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요양꽃 - 이주언

마루안 2020. 3. 3. 19:15

 

 

요양꽃 - 이주언


나도 복사꽃 같은 풍경인 적 있었네

침 흘리는 내 입술도 한때 사내의 귓불 뜨겁게 했었지 봉긋한 가슴 열어 어린 것의 입에 물리고, 기저귀에 퍼질러진 냄새가 아닌 꽃향기 흘리며 사내의 코끝을 자극하기도 했었지

내 속으로 숱한 바람 불어와 닫힌 물관부
건조와 뒤틀림으로 훼손된 몸의 장치들 사이에서
기억이 헛돌고 밤낮이 바뀌고 혼자 닦지 못하는 배설에도 식욕은 떠나지 않아

병실 침대에 나란히 누운 채 통로 쪽으로 발을 뻗어 이어가는 목숨들
요양 꽃병 속에서 끝물의 목숨 게워내는 일은 참혹에 가까워

내 안의 물 바닥이 뿌옇게 드러나는 시간
보호사의 손길 아래 말라가는 살가죽

아직 게워내야 할 무엇이 더 남은 것인지

생이 바닥나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네
소지를 태운 재처럼
나의 생, 가볍게 날려갈 수 있기를 바랄 뿐


*시집, 검은 나비를 봉인하다. 한국문연

 

 




뇌의 지형도 - 이주언


아버지의 뇌가 줄어들고 있다
병원 컴퓨터 화면에
지나온 생의 지도가 펼쳐진다

바람이 다녀간 골짜기엔

휘청거리며 귀가하던 영도 달동네
도깨비불과 밤새 씨름하던 북면 고갯길이
엊그제 일처럼 가까워졌고

오래전에 떠난 사람들이 뇌의 등고선을 따라 걸어 나온다
희미한 연기 속에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 듯

병동 바깥 계단에 쭈그려 앉아
혼잣말하며 담배를 피운다

반쯤 남은 꽁초를 문질러 호주머니에 넣을 때
여린 별빛 하나 따라 들어간다

계단은 병실과 장례식장 사이에 있다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는 아버지

동선을 따라가보면
침대 위에서 아기처럼 환하게 웃는 아버지가 앉아 있다

함박웃음에도 눈물이 고여
울음과 웃음이 뒤섞이고 있다



 

# 이주언 시인은 경남 창원 출생으로 창원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2008년 <시에>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꽃잎 고래>, <검은 나비를 봉인하다>가 있다. 제3회 창원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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