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기념품 - 신정민

마루안 2020. 2. 27. 21:34



기념품 - 신정민



야크의 방울

현관 경첩에 매달려 운다


방울이 울릴 때마다

산소가 많은 곳으로 내려오면 죽는다는 짐승

문 앞에 서 있다


내려가는 것만이 약이었던 고산병

그가 사는 곳에서 나는 죽을 것 같았고 내가 사는 곳에서 그는 죽을 것 같았다


서로, 라는 말은 뜻하지 않은 곳에 머무는 것이었고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일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 생은 어느 신의 기념품일까

외롭지 않으려고 사귀었던 친구들에게 사과를 해야 할 거 같다


미안해,

이렇게 쉬운 말을 좀처럼 할 줄 몰랐다


위로인 듯 흔들려

마음도 내 것 아니었다고

샹그릴라 롯지 삐그덕거리던 나무 계단 아래 묻어 둔 이름


까막눈 목동 대신 불경 읽는 바람

비로소 반짝이는 북극성 보고 집 떠난 식구들 찾아올까


계단밭도 한 해는 쉬어야지

설산 비탈에서 젖은 머리 말리던 여자의 붉은 다후다 원피스 자꾸만 눈에 밟혀


방목 중인 생(生)이 다음 다음 운다



*시집, 저녁은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는다, 파란출판








모래바람무늬 - 신정민



아버지는 TV를 켜 놓고 주무셨다


끄면 영락없이 깨셨다

방송 중인 곳에 돌려놓고 다시 눈을 감으셨다


필요했던 소음


먼 옛일이 어제 일보다 분명한 아버지에게

TV는 필요한 소음을 제공하는 훌륭한 기계였다


재미없는 드라마도 필요했다


방송 끝난 화면의 소음 속에 외계에서 오는 신호가 잡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버지가 별에서 왔다는 걸 알았다


밤하늘 자주 올려다보는 아버지의 버릇

떠나온 고향 어디쯤인지 가늠해 보는 것이었는데


별과의 접선을 시도하는 줄도 모르고

방송 끝난 TV를 자꾸만 껐던 것이었다






# 신정민 시인은 1961년 전북 전주 출생으로 2003년 <부산일보>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꽃들이 딸꾹>, <뱀이 된 피아노>, <티벳 만행>, <나이지라아의 모자>, <저녁은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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