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옛집의 기억 - 이철수

마루안 2020. 2. 26. 21:42

 

 

옛집의 기억 - 이철수


군불을 지피는 저녁, 흙집 아궁이에는
그을음 앉은 누대의 입들이 시뻘건 불덩이를 물고 있었네
그 완강한 불의 혀를 악물고 버팅기던 뼈마디들
홍보석 다비를 입회 하듯, 화엄의 후림불 앞
버언해진 궁핍의 입구에 앉아서 부지깽이 같은
알몸으로 맥없이 뒤적이는 불씨 속에는
낫처럼 야부로시 돌아나가지 못한 허공의
어둔 골목들이 있어

몽우리진 마음의 빈 노적가리를 둥글게 돌다돌다 지치면
긴 방죽길 오래 걸어서 붉은 달을 굴리며 몇 번씩
헛배를 채우던 바람의 씨앗들
멍석 깔린 골방 갈라진 흙벽 틈새로 스몃스몃 피어오르던
헛헛한 연기들은 어느 물길 잃은 어족의 상한 지느러미일까,
무명(無明)의 시간을 유영하며 지상에 발 딛지 못하는
모르피나비처럼 아픈, 저 허공의 춤사위
어둠보다 더 깊은 목울대로 뜨겁게 게워내던, 목피(木皮) 울음같이
타닥타닥 살 퍼런 멍의 허기를 핥던 불, 불빛
아, 어머니!
나는 늘 어두워져서 내 몸 안쪽 불그림자
어룽이는 정지문을 열고
비어져 나온 매운 연기에 흐려진 눈을 닦곤 했었네


*시집, 벼락을 먹은 당신이 있다, 시와소금

 

 




골목이라는 말 - 이철수


골목이라는 말은 왠지 깊고 어두워서 서글퍼지는 말이다
내 몸 안의 뜨거운 실핏줄 속을 오가는 피톨처럼 쓸쓸한
아버지의 주름진 울음주머니

밤새 폭음을 한 중년의 사내가 비틀거리는 걸음을 다잡아
집으로 돌아오는 새벽 어깨 위에 내리는 찬 이슬처럼, 따라오는
너무나도 투명한 생을 진저리치며 오줌발을 터는
낮은 담모퉁이

뜬 눈으로 꼬박 밤을 샌 외등처럼
사내를 기다리는 한 여자의 불면이 가닿은 축축한 베갯머리같이,
젖은 담장 밑

오래 전에 붙박인 전봇대에
더부살이 하는 달방과
개구리 소년들의 아슴한 기억의 몽타주 위를 서성이는
빛바랜 구인광고가 삼백예순날 긴 목을 빼고 주인을 기다리는,
목울대처럼 조붓한 민들레 영토

푸른 대문 안 산란한 나무들이
우렁우렁 떡잎을 키워 하늘을 오를 때 아이들은 태어나고
무럭무럭 자라서 공장엘 가고
어른이 되고 늙어, 먼 훗날
곡(哭)을 짓는 생사의 나들목

밤이면 추운 별들이 어듬을 끌어 덮고
또록또록 이를 부딪는 소리 눈처럼 쌓이고
낮은 지붕의 처마 아래 엎드려서
창틀을 닦고 있는 달빛이
눈을 감고도 훤히 드나드는 길


 

 

# 이철수 시인은 전남 영암 출생으로 1998년 <문학춘추> 신인상으로 등단했고 2012년 <문학세계>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벼락을 먹은 당신이 있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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