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을 - 김시종

마루안 2020. 2. 20. 21:56


마을 - 김시종



자연은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라는 당신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정적에 묻혀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무거운 게 자연인지 안다.

나일강 반사된 햇빛에 마르면서도

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는 스핑크스처럼

누구도 밀쳐낼 수 없는

깊은 우수로 덮쳐온다.

들러붙은 정적에는 자연 또한 포로이다.


자연은 아름답다,라는

지나가는 여행자 감상은 젖혀두어야 한다.

거기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던 사람과

거기 아니면 이어갈 수 없는 목숨 사이에서

자연은 항상 다채롭고 말이 없다.

떠들썩한 날들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안다 정적의 끝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왜 도마뱀은 일직선으로 벽을 오르고

왜 매미는 천년의 이명(耳鳴)을 울리는지도.

모두들 떠난 마을

이제 정적이 어둠보다 깊다.



*시집, 잃어버린 계절, 창비








하늘 - 김시종



아득하여 좋은 것이다

오제(尾瀬)*는,

들어가서는 안되는

오지의 거처 하나

가슴에 품어 그려봐도 좋은 것이다.


함부로 오르지 마라.

전승(傳承)의 신이 뻗쳐 있는

봉우리 정도는

멀리서 우러러 절을 해두라.


아득하여 좋은 것이다

떨어져 있는 나라는,

목소리 하나 이를 수 없는

울타리 안에서는

이마 위 오른손 물들어도 좋은 것이다.


구경 삼아 가지 마라.

오래된 길에 이정표 하나

천년의 침묵에 가라앉아 있다.

가서 더럽힐 맨몸으로는 가지 마라.


아득하여 좋은 것이다.

방치된 무덤과

희미해진 가향(家鄕)

함께 등 돌린 세월은

그것대로 아득해도 좋은 것이다.



*군마(群馬)현, 후쿠시마(福島)현, 니이가따(新瀉)현 경계 지역에 있는 일본 최대의 고원습지 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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