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울의 수도 - 안숭범

마루안 2020. 2. 21. 18:59



우울의 수도 - 안숭범



먼 도시에 관해 정의로운 불빛들아
멀리서 와서 멀리로 부는 바람에만 윤리적인 높이들아


언제나 발자국도 남지 않는 아스팔트 위였다
누군가에겐 쉬운 기적을 손톱으로라도 새기려 하였으나
여유로운 저녁을 예약하는 술법과 전략이 난무한 여기서
돌베개 위로 오는 천사들을 본 수천의 날들조차
수천 장 달력 너머로 깨진 손톱들과 버려졌으니


내민 내 손을 외롭게 하는 정의에게
올려다보다 꺾인 내 목을 돌보지 않는 윤리에게


간혹 물맷돌을 쥔 내 손을 찾았으나
나라는 물맷돌을 던지는 손들을 느끼는 순간
허공이었으니, 오늘도 공허의 쪽방을 열고
광야에서 들인 한 로뎀나무 아래에 눕는다


이 길의 뿌리를 생각한다



*시집,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 문학수첩








길게 오는 새벽 - 안숭범



투명해지는 마음, 이라고 적기 위해 일찍 눈을 떴습니다
새벽 첫 전철이 저의 시작을 싣고 갑니다
어제도 그제처럼 하나님이 가난보다 늦게 들르셨습니다
오래 정리되지 않은 이 통장은 삭은 걸까요, 삭힌 걸까요
저만치엔 만취해 누운 아저씨가 있고
오래 가만히 있는 것들이 내게 뭔가를 묻습니다
어디와 어디를 순환하면 바닥과 수평이 되는 걸까요
벚꽃이 흐느끼다 흐득흐득 피는 것을 보고 난 뒤여서
봄밤을 걷어차며 지나는 유행들은 나를 순환하지 않습니다
전철은 눈이 부운 잠실철교 외등을 외면합니다만
개정된 주기도문에 아직 실리지 않은 마음 곁으로
오늘은 하나님이 서글픔보다 서둘러 들르셨습니다
민첩한 문장으로, 처음이라는 듯
이 세계와 문학적으로 화해를 합니다


하나님, 세게 치면 세게 돌아오는 샌드백 같은 이 땅에서
과연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아 행복합니다






*시인의 말


요즘 아침엔 부쩍 가난해진다
당신과 반짝이는 이야기들을 꿈에 두고
빈손으로 돌아오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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