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상이 바뀌었다니 - 이철산

마루안 2020. 2. 19. 19:15



세상이 바뀌었다니 - 이철산



아무리 막일이라도 일당은 제대로 받아야지

공단 구석구석 하루를 헤매다 네거리 선술집에 앉은 늙은 노동자

새참으로 불어터진 국수를 눈 깜박할 사이 헤치우는 사내

때 절은 작업복과 공구 같은 손을 보면

활짝 웃으며 탁주 한 사발 거침없는 사내를 보면

다시 살아도 노동자 인생이라 이 공장 저 공장 기웃거리며

프레스든 용접이든 허드렛일이든 기술로 치면 더 말할 것도 없겠으나

늙은 사내 어느 공장에도 반기지 않는 눈치라

30년 공장 생활 단 한 번 노조 하다가 싸움에 나섰다가

잘리고 차압당하고 거리에 나앉더니

이 공단 저 공단 어디를 가도 꼬리표가 떨어지지 않는지라

구청에서 나눠 주던 공공근로도 이젠 끝나고

건설 현장 쫓아다니던 떠돌이 날품도 힘이 달려

행여나 마음으로 다시 공장을 찾아 나서는가 보는데

세상이 바뀌었다니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노동자

이제는 알아주는 세월인가 싶어 이제는 대접받는 세상인가 싶어

늙은 사내 새벽밥 차려 먹고 공단을 헤매고 공장 앞을 서성이다가

30년 노동 끝에 골병들고 지친 몸

아무리 허드레 잡일이라도 죽기 전에는 손 놀리지 않아

세상이 바뀌었다니 아무리 막일이라도 일당은 제대로 받아야지

세상이 바뀌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말끝마다 강조를 하는데

세상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 일하는 사람들 대접

알고도 모른 척 일당은 제대로 받아야 한다는 늙은 노동자



*시집, 강철의 기억, 삶창








강철은 - 이철산



골목 어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강철은 고철의 기억을 가지고 산다

위험하다고 말하는가

수많은 벼림 속에서 비로소 달구어져 빛나는

강철의 기억 속에는 망가지고 부러진 채

무너진 자신조차 숨길 수 없는

고철의 질긴 생명이 숨어 있다 되살아 있다

부끄러움을 녹여내는 아픔 속에서

달구어질수록 뜨거워질수록

고철의 쓰라린 추억을 기억하고 있다

패배 속에서 슬픔의 언저리에서

무너지고 쓰러지고 비로소 지키는 사랑

강철은 아름답다






# 이철산 시인은 1966년 대구 출생으로 공장에 다니며 글쓰기를 해오다 6회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다. 대구 10월항쟁 역사복원을 위한 글쓰기 모임인 <10월문학회> 회원이다. 현재도 고향인 대구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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