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서광일

마루안 2020. 2. 19. 19:09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서광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투덜대며 노인들이 몰려나온다


휴지에 라면에 건강 팔찌까지
천수관음보살처럼 손이 좀 많았더라면
담배만 축내던 영감탱이라도 따라왔더라면
마누라쟁이 같이 왔으면 야무질 텐데
근데 이 노인네들은 다 어서 기어 나온 거여
아이고 죽겄다 갈수록 시간이 모자라
한때 나도 놀았다면 논 몸이지마는
자식들한테 부담 주지 않으려면
스스로 알아서들 건강을 챙겨야지
피가 맑아지고 관절염에 당뇨에 혈압까지
무슨 박산가 의산가 테레비로 영상통화도 바로 해
<신이 내린 선물> 3개월 잡쉈더니
어떤 양반은 풍 맞은 왼쪽이 다 풀렸다대
원래 66만 원 하던 거 33만 원이면 거저지 붜
세 개 사면 옥장판도 무료로 준다는데
돈 있는 영감들은 콧방귀도 안 뀌고 사더라고
갈 데도 없고 자식들 바쁘잖어
공짜로 공연도 보여 주고 선물에 관광에
이렇게 살갑게 놀아 주는 데가 또 어딨어


정원 초과 벨이 울릴 때까지
노인들이 조급하게 밀어 대며 밀려들어 간다


줄 뒤로 또 긴 줄이 생긴다



*시집,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파란출판








이 - 서광일


1

밥을 비벼 먹다가 어금니 조각이 나왔다
미안해지는 일은 불쑥 찾아온다
깨진 자리에 혀끝을 넣어 본다


날카롭고 서운하고 시리다
사라진다는 게 이런 건지도 모르겠다
더 썩기 전에 사랑니를 빼야 한다


비뚤어진 사랑니 때문에
어금니는 조금씩 금이 갔을 것이다
빠진 자리가 잘 채워지지 않는다


깨진 조각을 버리지 못했다


2

오랜만에 그를 만난다
워낙 말이 없는 양반이라
우물우물 뭔 말을 만들려다 만다
주름이 더 깊어졌는데
거기서 빠져나간 것들은 어디로 갔나
인사치레로 건강이나 좀 묻는데
또 어물쩍 넘어간다
부자간 대화법은 늘 이런 식이다


이가 다 드러나도록 웃어 본 적도 없고
그나마 툭 터놓고 얘기해 본 적도 없다
뜯어진 창호문도 아니고 어째 발음이 샌다
아 좀 해 봐 아부지 거시기 아따 얼른
아버지는 꾸중 들을 아이마냥 겸연쩍 입을 벌린다
앞니가 다 없다
뭔가에 세게 부딪히거나
걷어차여 본 사람은 안다
저 자리가 얼마나 눈물 나는 자린지
악 소리도 안 나는 자린지


열세 살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인근 우시장이 그의 직장이었다
팔 수 있는 짐승은 다 팔았다
돼지 뒷발차기에 네 개
야매 의사 교정기에 마저 두 개
연락도 없이 찾아온 통에
틀니도 못 끼우고 마주친 것이다


흰머리와 주름살만 세느라
입속은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자식들 다 떠난 집에서
혼자 빼서 담가 논 틀니가
세면대 위 대접에 덩그러니 담겨 있다
나는 수돗물을 잠그지 못하고
연거푸 세수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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