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낙조 - 조성순

마루안 2020. 2. 12. 21:31

 

 

낙조 - 조성순


입춘 갓 지나 바람이 아직 찬데
탑골공원 부근
비아그라 일라그라 자이데나
가짜 정력제 늘비한 만물상 앞
얼굴 주름이 굵은 밭고랑으로 팬
늙은 오빠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꼬깃꼬깃한 지폐 건네고
무언가 받아 급히 주머니에 감춘다.

녹색 신호 받아 건너는 발걸음이
쿵, 쿵, 전쟁터로 나가는 대장군이다.
구부정한 어깨가 눈보라 몰아치는 산맥 같다.


*시집, 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 KM

 

 

 

 

 

 

너도바람꽃 - 조성순


군대 가서 첫 휴가 받아 휴가증 고이 접어 가슴에 넣고 한껏 들뜬 마음으로 용산역에서 고향 가는 표를 사려고 길게 늘어진 줄 꼬리에 서 있었지. 근데 어디선가 갑자기 돌개바람이 휙, 모자를 낚아채 가지 뭐야. 모자를 잃어버리고 중대가리로 돌아다니는 군인은 탈영병이거나 무적의 싸이코패스야. 당황하여 둥실둥실 날아가는 모자를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니 모자는 어느 후미진 좁은 골목 끝에 가서 떡 멈춰 서는 게 아니냐. 쉿, 바람의 정체는 생계형 꽃이었어. 어쩔 수 없이 꽃값으로 휴가비를 탈-탈 털어주고 모자를 돌려받았지. 꽃이 피었는데 벌 나비가 오지 않으니 꽃은 살기 위해 길을 나선 거야. 가끔 도회를 떠나 배낭을 메고 깊은 산속 길을 가다가 어디선가 오라버니, 하고 부르는 소리에 두리번거리다가 돌아보면 길가에서 말갛게 새살거리는 게 발걸음을 붙잡고 있지 뭐야. 쿵쾅거리는 가슴 진정하고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보니, 오호라, 지난날 벌이 되어, 나비가 되어 좁은 골목길을 허겁지겁 쫓아가서 만난 더운 숨결이 바로 너였구나.



 

# 조성순 시인은 경북 예천 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9년 이광웅, 김춘복, 김진경, 도종환 등과 함께 교육문예창작회를 창립하고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 <문학나무> 신인상을 받고 2011년 교단문예상 운문 부분에 당선됐다. 시집으로 <목침>, <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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