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다몽(多夢) - 문저온

마루안 2020. 2. 9. 19:12

 

 

다몽(多夢) - 문저온
:지나치게 꿈을 많이 꿈.
영혼의 피로한 발바닥.


불면과 다몽 중에 고르라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그가 묻는다.
결핍과 과잉 중에 무엇을?
틀렸습니다. 과잉과 과잉이지요, 말하자면.
뜬 눈과 감은 눈의 차이일 뿐입니다.
필름은 돌아가지요, 밤새. 단독 관객, 단독 상영입니다.
티켓은 없어요. 발권하더라도 무작위니까요.
극중극, 옴니버스, 컬트와 호러를 넘나들지요.
밑도 끝도 없는 상상력이 추진력입니다.
더블 캐스팅은 다반사. 급할 땐 머리만 바꿔 달고 등장해요.
의식과 무의식은 끝 간 데 없이 전진하고,
그것은 둘 다 밤만이 줄 수 있는 증상입니다.
내려 닫아 잠그고 싶은 눈꺼풀이 기어이 말려 올라가는 뻑뻑한 눈알.
치켜떠서 빠져나오고 싶으나 혼몽의 늪을 허우적대는 납 같은 눈꺼풀.
그러나 오로지 나에게만 복무하죠.
그리고 오로지 두려워집니다, 결국엔.
깨어 맞닥뜨리거나 반쯤 죽어 당하거나, 나는 위태롭지요.
오로지 나는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일전에는 목을 걸타고 앉은 검은 것에 짓눌리다 가까스로 비명을 끄집어냈지요.
그리고 내가 찾은 건 옆 사람이 아니라 냉장고에 든 찬 소주였어요.
우습지 않습니까? 나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더란 말입니다.
어쩌면 선생이 치료해야 할 것은 이런 나의 방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나는 자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지요. 불면 중이건 악몽 중이건.
그런 강박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자야 하므로, 나는 소주를 털어 넣었지요.
옆 사람은 나의 악몽으로 동행할 수 없습니다만,
소주는 내 핏속을 덥히고 나와 동행해 검은 것을 같이 맞닥뜨리겠지요.
그리고 조금은 담대해질 거라 믿는 겁니다.
그 밤에 나는 소주를 비우고, 병을 치우고, 잔을 씻었습니다. 물기를 닦고 찬장에 넣었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현실에 악몽의 흔적을? 내일에 오늘의 흔적을? 옆사람에 내 불안의 흔적을?
그 모두였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전장으로 가는 사람처럼 술로 더워진 몸을 칼처럼 쥐고 작심하듯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자아, 선생은 불면과 다몽 중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둘 중 어느 것을 내게서 치워주시겠습니까?
오지 않는 새벽과 끝나지 않는 밤.
핏발 선 눈알에 까칠한 정신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혼곤한 꿈자리 중 무엇을?
그러나 선생은 선생의 병상에서, 나는 나의 병상에서 홀로 고투할 뿐.
우리는 남의 방, 남의 나라, 남의 육신 속으로 자막 하나 던져 넣을 수 없는 짧은 팔들일 뿐입니다.

 

 

*시집, 치병소요록, 문학의전당

 

 

 

 

 

 

# 문저온 시인은 1973년 경남 진주 출생으로 2015년 <발견>으로 등단했다. <치병소요록>이 첫 시집이다. 한의사로 일하고 있는 여성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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