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난의 목록을 적다 - 고재종

마루안 2020. 2. 8. 21:28



가난의 목록을 적다 - 고재종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가난으로
한서이불과 논어병풍을 칠 정도는 아니다
시골장엔 논어보다 싼 이불이 많다
어떤 이는 자발적 가난을 말하고
백이숙제는 깊은 골의 채미가를 불렀다지만
돈이 없어서 잡초를 요리로 삼은 시인도 있다
풍요로운 가난과 빈곤한 부유함이라니?
디오니게스는 길가 통 속에서 볕을 쬈다지만
시골집의 헌 유산을 우거 삼은 나는
무슨 생각이라거나 뜻도 없다
그냥 가난이라는 것을 가난이려니 여기며
피칠갑을 한 자본을 위해 일하지 않는 자유로
연두초록과 광풍제월(光風霽月)을 거느린
내 가난의 고귀한 목록엔 장미의 열정도 있다
휘파람새가 좋아 늘 휘파람을 불었지만
전교 일등 아들을 차마 공장으로 보낸 한과
그 탓에 평생을 룸펜으로 떠돈 분노가 있었다!
가난의 실제적 세목을 적다 보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건
홀로 대숲에 앉아 달을 맞는 사람일 뿐이지 싶다
이러구러 세월의 갈기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꺾으니 성성적적이라는 말 떠오른다



*시집, 고요를 시청하다, 문학들








낡은 벽시계 - 고재종



사회복지사가 비닐 친 쪽문을 열자
훅 끼치는 지린내하며 어두칙칙한 방에서
두 개의 파란 불이 눈을 쏘았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산발한 노인의 품에 안긴
고양이가 보이고, 노인의 게게 풀린 눈과
침을 흘리는 입에서는 알 수 없는 궁시렁거림.
그 위 바람벽의 사진액자 속에서
예닐곱이나 되는 자녀 됨 직한 인총들이
노인의 무말랭이 같은 고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마지막으로 모여들게 되는
그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이 귀착점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고양이의 형광에 저항하며
노인의 극심한 그르렁거림을 지탱시키느라
사회복지사가 괘종시계 태엽을 다시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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