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서성거리는 내가, 당신에게 - 한관식

마루안 2020. 2. 6. 19:25



서성거리는 내가, 당신에게 - 한관식



가령 당신과 전생에 한 몸이었다고 칩시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감꽃이 피면

당신은 찰랑거리듯 졸고

그 모습 숨죽이며 멀리에서 보고 바라보고

맨발의 꽃잎은 어쩜 저리도 당신을 빼다 박았을까요

감꽃이 길에서 詩가 되던 날,

당신의 창가는 정적으로 자욱합니다

늙은 새가 날아가며 저녁을 떨어뜨립니다

빈곤한 뜰에도 불빛이 찾아듭니다

이미 한세상을 당신 몸으로 살았기에

이 生은 비켜가도 좋다고 그렇다고 그런 거라고


아직 비는 내리지 않습니다

당신 창가에 수줍은 담쟁이넝쿨처럼

조그맣게 몇 안 남은 저녁 햇살 부스러기처럼

행렬의 뒷전에서

당신과 전생에서 한 몸이었다고 칩시다

마음은 분주하고 어둠은 차곡차곡 쌓이고

떠도는 발치 끝에 여윈 기침소리가 툭

누운 감꽃이 오래지 않아 빛납니다

새벽은 또 무슨 꽃을 피워 올릴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내 입안은 어제처럼 은빛 한숨으로 가득합니다



*시집, 밖은 솔깃한 오후더라, 보민출판사








그래도 된다면 - 한관식



참 살다 보니 그런 일도 있다네

대못 하나 가슴에 쾅쾅 박는 아픔도 아니고

종일토록 우는 잔 나뭇가지 떨림도 아니고

스스로 숯검정처럼 태우고 싶은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당신을 만난 이후로


내 이전의 당신은 당연한 세상을 가지고 있다네

무릎베개의 남편과 올망졸망한 아이들과

순한 이웃과 종일 수다 떨 친구들과

그런 연유로 옹골차게 내 속에 앉히지 못한다면

늙어가는 세월을 뻐끔뻐끔 보낼 수밖에

그래도 억울하지 않는 거라


지금 비는 쏟아지고

내 마음의 풍향계가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

알지 못하는 당신 언저리에서

오래도록 웅성거리고

오래도록 보채고





*시인의 말


종종 내 안에 문이 닫혀 있곤 했다

그런 날이면 저릿저릿하도록 냉기를 느끼면서

자꾸만 딸꾹질이 나왔다

숨을 참고 침을 삼키며 뒤꿈치도 들어보고

그도 저도 아니면

덜그럭거리는 걸음으로 거리로 뛰어가

흰 블록과 검은 블록을 교대로 밟으며

왠지 이상할 것도 많았던 시간


그 즈음의 일이었다

아래가 펑퍼짐한 어항 물갈이를 위해 손을 담그면

작고 경계심이 많은 열대어들이

수면을 향해 솟는 산소발생기 기포를 따라

간질간질 손가락 사이를 헤집으며

왠지 어색할 것도 많았던 시간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오는 밤길에

나를 만난 저만치에서 당신이

왠지 궁금할 것도 많았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