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기억의 내부 - 천융희

마루안 2020. 1. 29. 19:40

 

 

기억의 내부 - 천융희
-알츠하이머


오래된 마을에는 오래된 사람들로 헐렁하고  
그들은 같은 속도로 늙어 가고

대부분 최초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빈 가지에 주저앉은 눈동자로
균형을 잃고 헤매는 구름만 무성하고

주름진 골목 어귀
기우뚱한 회전의자가 정물처럼 낯설게 놓여 있다
삐걱,

갑자기 친절해진 방문객들은
매우 공손하게 그들을 안내한다

한 번 내디딘 발은 결코 되돌리지 못한답니다

더욱 깊어진
더욱 높고 더욱더 단단한 고립의 벽
대체 바람은
얼마를 더 삐거덕거려야 모서리가 닳을 것인가
둥글어질 것인가

기억의 내부가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고
몸의 각도가 등과 바닥을 중심으로 집중한다

당신이 앉았던 자리 또 다른 당신이
빛바랜 등받이와 움푹 팬 바닥 사이로

당신이 앉았던 자리 또 다른

어느 날, 문득 당신이


*시집, 스윙바이, 한국문연


 

 

 

 

꽃의 온도 - 천융희
-입관


애도가 뜨겁거나 미온적일 때
바람은 더 이상 당신을 점령하지 못한다

봉인된 사람을 잠시 열면 숨을 거둔 채 피어 있는 흰 꽃들의 정적

한 마리 나비의 꿈속으로 몰입한 당신이, 소환된 당신이 가장 숭고해지는 시각이다

날개를 접어 불러들인 꽃의 온도는 바스라질 듯 고요하고

잠의 무늬가 평면의 자세로 완성된다는 것에 대하여, 최후의 지점은 언제나 가볍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결코 낯설지 않다

당신이 흘린 마지막 눈물과 아무도 받아주지 못했던 당신의 심장이 어디로 귀결하는지 또한 우리는 안다

뜨거운 이별과 꽃들의 슬픔이 불타오를 때 누가 누구를 달래줄 수 있단 말인가

한낱 먼지처럼 흩어져 단호하게 돌아서는 우리는 그저 바스러질 듯 고요한 한 송이 꽃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말

미안할 때가 많다
불러들인 낱자들 이 땅 은유와 직유들에

사유의 詩線에 가 닿기를 바라며
당신,

고마울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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