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노을 화첩 - 황학주

마루안 2020. 1. 28. 22:59



노을 화첩 - 황학주



나는 노을 내리는 멀리에 쪽문 하나를 갖고

나는 봄이 될 때까지 눈 내리는 나무 위에 으름덩굴을 올리고 앉아 있을 텐데


제 얘기만 하며 계단을 올라가도 사고를 할 수 있는 거냐

네 얘기만 하며 내려가는 동안에도 사고를 할 수 있는 거냐

계단에서 시간이 충돌하느라 잠시 멈추는 듯하다


물새들이 대략 못질을 하며 물위를 날다가는

그 분량 터무니없는 인생이 가고 있다 하늘의 빈칸 밖으로


그래도 노을인데

받을 곳은 사람의 눈, 그 깊은 헛간밖에 없어


문득 쪽밭 있는 눈 밑이 붉어지고

희끗희끗 버짐을 바르며

지는 것들의

얼굴 피다


오늘은 둘러둘러 갈 생각이 없으니

같이 살자고 해버리나

노을은 만지고 싶은 뱃살로도 슬몃 부풀어

괜히 수줍은 자세인진 몰라도


꼭 그게

불행 같진 않아서

홍당무가 된 얼굴이 쩔쩔매는 말로

내 얘기는 없어도 되고

욕조는 당신만 써도 된다고


아, 노을은 왜 저렇게 사실적이어야 하고

고만큼 둘이 먹을 만큼도 가진 게 없는 시간인 걸까


말이야 못하겠는가 노랜들 못 부르겠는가

뚝, 눈 그친 날의 보라색 침묵이야말로

이 장르의 가장 진한 사담


그래도 같이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에 대해 하루에 몇 가지를 알아버리고 울던

화첩엔

암자색으로 뭉그러진 바다가

꽃베개 하나를 올려놓으며 조용히


진다



*시집,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문학동네








노인 - 황학주



시간을 볼 수 있게

구멍을 걸어둔 벽 안으로

염소떼 같은 밤을 끌고 온 진눈깨비


라디에이터에 양말짝을 너는

노인이 하룻밤 머물며 한소리 했다 함세


남의 집기에 딱지를 붙이며 가난했던 집달관

백주에 믿고 싶지 않은 세상을 만나면

자신부터 구해야 했던,

나도 일찍이 폭력적인 인간은 아니었네


밤이 오고 아침이 온다는 게 뭐겠나

누름적 부치는 얼굴로

달이 창에 뜨고

거리에 나와 있던 기물들의 마음을 밤새 비추는 식이면

늙은이의 괜찮은 소일(消日)로 치지


내가 죽고 심홍을 들여다보는 자식이 커서

불 피운 자리를 모아다 아침으로 쓸 테고


시간은 결국 나를 막았지만

시간이 있던 자리에 염소의, 풀뿌리 뽑으며 울던 앞니


해가 넘어가도록 송달되지 않은, 불거주하는, 다름아닌 나의 하루도 연루되지 않은


목소리는 나를 향해 돌도 들었고


친모가 없는 시인의 패밀리

가족의 식탁에 남겨진 폭력을 겨우 치웠으니

이걸로 구실을 삼네


집달관이 갈 때까지

정신줄 놓지 않고 깜박이는 별이 뜨고


어느 임의 창에 맺혀 있을

염소 울음

시린 밤


좋아서 스스로 누워보는 어두운 노인

별자리처럼 몸이 꺾인다






# 눈으로 읽을 때는 가슴에 착 달라 붙고, 입으로 읽을 때는 혀에 착 달라 붙는 시다. 좋은 시란 눈으로 읽고 나서도 나에게 들려주듯 조용히 다시 암송하고 싶은 시다. 황학주의 시가 그렇다. 오랜 기간 그의 시를 읽었지만 왜 그의 시는 읽을 때마다 쓸쓸해지는가. 애잔하고 쓸쓸한 시가 더욱 살고 싶게 만든다. 마음을 비우니 더욱 착하게 살고 싶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의 내부 - 천융희  (0) 2020.01.29
징잡이 - 조유리  (0) 2020.01.29
구름이라는 망명지 - 이은규  (0) 2020.01.28
요양병원에서 - 윤일현  (0) 2020.01.28
설날 - 이시백  (0) 2020.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