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뽕짝 아저씨 - 김요아킴

마루안 2020. 1. 18. 19:12



뽕짝 아저씨 - 김요아킴


​막차는 느리다


기다리는 이는 없지만, 꼬박꼬박
정류장을 지나치는 법이 없다


시대의 등짐을 지듯
자정 가까운 도심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아저씨는 달팽이 뿔이 된다


밤보다 더 캄캄한 차 안으로, 고단한
유전자를 타고난 우리들 달팽이관으로
매번 핸들 잡은 투박한 손이
현철과 주현미를 지휘한다


창밖으론 오늘 일들이 청중으로 자리 잡는다


꿈속에서조차 쿨럭거리는 공장의 기계음이
때론 수험문제집의 숨 막히는 연필 소리가
적절한 장단으로 추임새를 넣는다


그 감동은 죽음보다 깊은 잠으로 대신하며
막차는 한 편의 가요무대가 된다


하나 둘, 명멸해가는 가로등이 조명 같다


뽕짝아저씨는 늘 느리다



*시집, 그녀의 시모노세끼항, 황금알








순걸이 형 - 김요아킴


불혹을 넘기자 생이 흔들리며 다가온다
그는 배냇저고릴 입으면서부터 응당 세상은 고요한 것이라 했다


늘 믿었던 지척의 거리도 불편하다
그는 캄캄한 눈동자에서 머언 바다의 모습이 보인다 했다


매번 돋수를 높이는 안경 너머 세상은 불투명하다
그는 귓바퀴에서 포착되는 모든 소리로 앞을 본다 했다


낯선 시력은 가야 할 발걸음마저 당황케 한다
그는 지표면과 연신 타진할 막대기만 있으면 어디든 간다 했다


봄날 나무껍질을 뚫는 싹의 몸살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코끝에 서성이는 바람으로도 봄을 안다 했다


곁에 누운 아내도 그림자만 보인다
그는 점자로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의 체온이 있어 고맙다 했다


희뿌연 최루가스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던 약관의 꿈이 그립다
그는 부옇게나마 한 번도 느끼지 못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어 했다


시장 골목 귀퉁이 백열등 환한 막걸리 잔 위로, 문득
그 형의 눈물 한줌을 꺼내다 보는 중년 사내가 멍하니 앉아 있다






# 중년이 되면서 여기 저기 고장난 곳이 생긴다. 딱히 수리를 하기에도 애매한 미세 잔고장이다. 나사가 조금 느슨해지면서 성능이 떨어지는 부위가 몇 개쯤 있다. 다시 조인들 곧 풀어지겠으나 있는 대로 받아들이며 이런 시 읽는 힘으로 버틴다. 어느 세대인들 풍요롭겠는가마는 인생은 고단해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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