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엔 주소가 없다 - 이원규
-일생 단 한편의 시 5
탯줄을 끊고 열아홉 번 이사를 했다
지리산에서만 여덟 번 빈집을 떠돌다
백운산 토끼재집 외딴집에 들었으니
이승의 본적이야 분명한데
현주소는 갈수록 무성한 가시덤불
저승에 가서도 자주 이삿짐을 싸야 할지
포항 죽도시장의 어묵 할매가 말했다
지녁 묵었는기요?
내사 마 속시끄러버 몬 산다
서방 곡소리 난 지 오십 년
가로늦게 글씨를 다 배웠다카이
생과부 명줄 맨키로 할 말이 쎄리삣다
인자 서방 원망도 다 꺼꾸라졌으니
우야노, 우짜믄 좋겠노?
억수로 보고 잡다고, 우짜든 쫌만 더 기다려달라꼬
부지깨이로 핀지를 쓰면 또 뭐 하겄노?
저승의 새파란 서방님은 주소가 없다카이!
*시집, 달빛을 깨물다, 천년의시작
밥맛 - 이원규
지화자, 좋다 몽! 얘들아, 밥 먹자
설날 아침에 대견한 강아지들을 부르자
흰 꼬리 부채질에 눈발이 날린다
문득 한 생각이 일어 사료 두 알 먹어봤다
푸석한 것이 어디 혓바닥뿐이랴
무심코 내뱉는 말에도 독이 있고
눈길 손길 마음결에도 악취가 나겠지만
내가 먼저 밥맛을 보고 준 적이 없다
내가 먼저 개처럼 킁킁거리지 못했다
이 땅의 누군가 개밥을 주듯이
나에게 불쑥 찬밥을 내밀 때
어머니처럼 먼저 쉰 맛이라도 보았는지
자꾸 궁금해지는 정월 초하루
네 발의 기억으로 개밥을 먹는다
아무래도 이승의 공짜 밥을 너무 많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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