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죽음에 대한 명상 - 황원교

마루안 2020. 1. 16. 22:33



죽음에 대한 명상 - 황원교



매일 너에게로 간다

한때 꿈꾼 적이 있으나 사랑하지는 않는다

죽음을 원한다면 삶이라는 고통부터 만끽하라던 고흐의 말이 무색하게

더러는 사무치게 그리워한 날도 있었으나....

생각해보라!

단 하루도 바람 앞의 촛불 같지 않은 날이 있었던가

그 길은 오로지 일방통행이며

마침내 만나는 수천수만 길의 벼랑 끝

가눌 수 없는 허무의 종착지인 줄 알면서도

매일 너를 향해 나는 간다

머지않아 이 고달픈 여정과 수고가 끝나고

나 홀로 향내 그윽한 적멸(寂滅)에 들지라도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는 죽음이라면 얼마나 쓸쓸할 일인가

정말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앞서간 이들을 내가 쉬이 잊어버렸듯이

남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가뭇없이 내가 지워지는 일

세상 어디에도 좋은 죽음이란 없으며

죽음은 참혹한 슬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 자루의 촛불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타올라서

모두에게 기억되는 아름다운 이별을 하자

어느덧 누런 플라타너스 잎처럼 뒹구는 생이여

날이 갈수록 절룩이는 발걸음이지만

너무나 멀어 가닿을 수 없는 별과 같은

금지된 사랑 하나 가슴에 품은 채

매일 너에게로 나는 간다



*시집, 꿈꾸는 중심, 도서출판 시가








설중납매(雪中蠟梅) - 황원교



섣달 눈 속에 핀 납매처럼

정말 미친 듯이

사랑을 피워보는 일,

그런 뜨거운 열망으로 하루하루를 살리라

산다는 것이 죽어가는 일이라면

불쑥 예고 없이 찾아와 문 두드릴

얼음장보다 차가운 그 손을 잡아야 하리

잡아야 하리, 그때가 언제든

맨 처음 이 세상에 나올 때

잠깐 빌려 입고 온 몸뚱이조차 내 것 아니듯

본래부터 내 것이란 없었으니

그저 매 순간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

오늘이 마지막 날인 듯 혼신을 다해 사는 것은

섣달의 납매처럼

보란 듯이 생을 꽃 피워보는 일

그리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시리도록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

푸른 불꽃 일으켜

눈 속에서 두 눈 부릅뜨고

내 앞의 겨울과 눈싸움이라도 한 판

걸지게 벌여보는 것이다






*시인의 말


돌아보면

체 게바라와 같은 꿈도 배짱도 없었던

허망한 육십갑자였다.

하지만 그런 나 자신을 사랑해야 했고,

견디고 버티며 여기까지 왔다.

더 이상 무엇이 두려우랴.

어느덧 상처들도 굳은살로 박혀

단단한 맷집이 되지 않았는가.

무릇 살아 있는 게 기적이고 은총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내일이 궁금해서 죽지 못한다.

그래서

이 채굴을 멈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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