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폭설, 그 흐릿한 길 - 심재휘

마루안 2020. 1. 16. 21:51



폭설, 그 흐릿한 길 - 심재휘



아주 떠나버리려는 듯
가다가 다시 돌아와 소리 없이 우는 듯이
눈이 내린다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뛰어가다가 뒤돌아서서
폭설이 퍼붓는 길이다 그러면 이런 날은
붉은 신호등에도 길을 건너가버린 그 사랑이
겨우 보이도록 흐릿해져서
이런 날은 도무지 아프지가 않다


부풀어오른 습설이 거리에 온통 너무 흩날려
이편과 저편의 경계가 지워진 횡단보도는
건너지 않는 자들도 그냥 가슴에 품을 만하다
길 옆 나무가 내게 손을 내미는지
내게서 손을 거두어가는지 알 필요가 없고
휘청거리는 저녁은 어디쯤에 있는지
이별은 푸른 등을 켰는지
분간할 필요도 없어서


그저 떨어지는 빗금들이 뒤엉켜 서로의 빗금을 지울 때
흐릿한 모든 것들, 사이에, 쓰다 만 글자처럼 서 있으면
그날의 윤곽은 악보 없이 부르는 나지막한 노래 같아서
눈코입이 뭉개어진 이런 날은 오래도록 아프지가 않다



*시집,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먼 길 - 심재휘



국수집 창가에 앉아서도 먼 길을 가는 사람
버스를 놓친 외진 정류장이 둘만의 끼니인 듯
늙은 엄마와 다 큰 아들이 국수를 시켜 놓고
까마득한 두 그릇을 시켜 놓고
국수가 나와도 탁자를 박자껏 두드리기만 하는 아들의
중증 독방을 앓는 손가락에는 먼 길이 숨어 있어서
몸이 굵은 아들에게 면 가락을 물려주는 엄마의 젓가락에는
먼 길이 숨어 있어서


떠나간 버스가 아직도 흙먼지를 날리는
국수집 창가 자리에는
비가 오지 않아도 젖은 길이 있다
놓친 버스를 보며 장화 신는 세월의 옆얼굴들을
말없이 어루만지는 봄볕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빼려다
접어 넣은 먼 길까지 와락 쏟아져 나온다
동서남북이 다 닳은 주머니 안으로
구겨진 것들을 도로 집어넣는 엄마
그녀는 결국 숨겨놓은 먼 길을 들키고 만 것인데
다만 오래 걸어가야 하는 것뿐이란다 아들아
먼 길을 가려면 아들아 너도
국수를 잘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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