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픔은 양생 중이다 - 김남권

마루안 2020. 1. 11. 21:45

 

 

슬픔은 양생 중이다 - 김남권

 

 

발신인이 없는 눈물을 받았다

바람 같은 전파를 타고 왔는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체화된 적 없는 직선이

내리고 있다

 

살갗이 젖는 속도보다

가슴이 젖는 속도로 시간이 산화하는 동안

백발의 포물선이 수평의 하늘을 건너와 숨을 거둔다

 

변산의 노을 속에서 마지막 사랑이 걸어 나왔다

피 흘리던 낡은 심장은 멈추고 갯벌을 집어삼킨 바람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눈물을 훔쳐 왔다는

김씨 가문의 오래된 비밀을 알고 있는

5대 종부 이씨 부인은

골방 신줏단지 항아리를 꺼내 부수고 말았다

 

방 안 가득 눈물이 번졌다

벌써 오십 년 전의 일이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사내가 가을 우체부를 통해 배달된 소포 상자를 뜯었다

 

오십 년 전에 발송했다는 소포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의 눈물이 들어 있었다

철이 들기도 전에 집 밖으로만 겉돌던

아들 얼굴 한번 보려고

명절 때마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해가 지도록 술을 마셨던 아버지는,

삼 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다

술에 탄 농약을 마시고 한 줌의 재가 되었다

 

텅 빈 상자는 젖어 있었다

발신인이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시집, 발신인이 없는 눈물을 받았다, 시산맥사

 

 

 

 

 

 

폭설 - 김남권


1월 중순, 폭설이다
마땅히 전화할 데가 생각나지 않는다
단골집에서 산초두부 시켜 놓고 혼자
주전자 막걸리를 마신다
눈 오는 소리가 들린다
하름 하름 시름 시름
눈 속에 흰 몸이 녹고 있다
하필이면 초저녁에 폭설이 내리다니
하필이면 어둠을 분별하는 폭설이라니,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폭설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텅텅, 울리는 허공을 본다
이렇게 폭설에 고립될 줄 알았다면
며칠 전에 여기를 떠났으리라
아무도 오지 않는 여기서 잠들지 않았으리라
바람이 고립되었다
중력을 잃은 눈송이들이 봉분을 만들었다
돌아가기에 따뜻한 시간이다
꿈을 꾸기에 알맞은 온도다
눈이 쌓이고 눈이 덮였다
발자국 아래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그와 눈이 맞았다
심장이 하얗게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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