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적당한 존재 - 김준현

마루안 2020. 1. 12. 18:40



적당한 존재 - 김준현



서랍이 열리는 서랍을 닫아 놓았다
죽음을 인정하려면 수많은 전화가 필요해 비숫한 목소리와
목소리의 온도가 귀의 온도가 되어 갔다 
좋은 곳으로 갔을 거라는 말과 좋은 곳이 없었던 몸 사이에서
나는 적당히 존재했다


그림자와 붙임성 있는 날들을 보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한통속처럼 검은 표정으로 왔다가
검은 표정과
색다른 표정으로 돌아갔다


창문으로 분해된 기분
별이 있어도 보이지 않으면 별이 아닌 것처럼
언제든 어두워질 자유처럼


고양이들의 모국어는 발소리다
시간을 죽이고
발소리를 죽이는 법, 무언가를 살해한다는 건
종이의 기분 같은 것이다
글씨의 체중이 의미에 따라 다른 이유 같은 것이다


한 편의 시가 잡종이 되어 갈 때, 문득
너 요즘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아, 친구가 말하는
다른 곳에서 살고 싶을 때


열쇠 구멍이 열쇠를 듣는 것처럼
열린 문
을 잠그는 것처럼 중국인은 중국어를 하지 않았고
일본인은 일본어를 하지 않았던 교실에서
수많은 검은 머리들과
교복들 속에서


나는 적당히 존재했다



*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 민음사








인간의 것 - 김준현



사람이 없어도
그네가 흔들리는 감정처럼
살아가는 것과 죽어 가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없다


감추고 싶다고
손가락이 있어도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장갑을
벙어리라고 할 때도
장애와 침묵의 차이를
알 수 없다


다만
손가락이 없어도
손가락이 있는 장갑을 끼려는 감정이
뼈도 없고
살도 없는 손가락처럼


흔들리고 있을 때
우리는 바위와 보자기의 차이를 알 수 없으니
가위를 쥐어 본 적 없고
그래, 아무것도 쥐어 본 적 없는 손


일요일만 남아 있는 일주일처럼
두 손으로
기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도할 수 없는
형식이 있다


눈 덮인 내 차와 네 차를 알 수 없는
백야와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열두 시의 눈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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