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랫방에 혼자 살았다 - 이중도

마루안 2020. 1. 10. 22:43



아랫방에 혼자 살았다 - 이중도



아랫방에 혼자 살았다
어마어마한 생산력을 자랑하는 복숭아나무에서 태어나는 무수한 벌레들처럼
생각과 욕망이 들끓는 사춘기를
창틈으로 흘러 들어오는 파도 소리 삭은 그물 냄새 섬들의 잠꼬대 속에서
애기 울음소리로 밤의 순결에 자상을 입히는 고양이들 속에서
죄악을 심판하는 고대의 우박처럼 천장을 두들기며 뛰어 다니는 쥐 떼 속에서
고추 도둑들 족제비 같은 호박 서리꾼들 속에서
제사 때마다 찾아오는 망자들 속에서
제상 위에서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
쪄놓은 농어 돔 안주로 술잔 비우는 소리
눈 부리부리한 수탉 눈치 보며 슬그머니 나가는 소리 속에서
육송의 통뼈로 세운 집
아랫방에 혼자 살았다
여름 되면 두 아름 무화과나무가 거대한 허파로 부풀어 오르는
지게 작대기만 한 구렁이가 자신의 신격을 아는 구렁이가 느릿느릿 돌담을 넘어가는
오래 묵혀둔 신발에서 한 척 지네가 기어 나오는
기어 나와 검은 소년의 목구멍으로 사라지는
늙은 암소가 추억에서 둥근달을 꺼내 되새김질하는
황토의 살로 두른 집
아랫방에 혼자 살았다



*시집, 사라졌던 길들이 붕장어 떼 되어 몰려온다, 천년의시작








달동네 - 이중도



말라 죽은 굵은 칡넝쿨 같은 골목길
지붕과 지붕이 맞닿은 집들
지킬 세간도 없는데 백상아리 이빨 촘촘히 박힌 담장들
녹슨 못으로 막아버린 가슴 높이의 창문들
그물 울타리 삭아 허물어진 시커먼 밭뙈기 몇
잦아들어 한 방울 이슬이 된 생들이 벗고 떠난
허물의 잔해처럼 남아있는 배추 시래기들


벌레 울음소리 간단없이 피어오른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한때 깃들었던
사람들의 흔적을 기화(氣化)시켜 허공에 채우는 벌레 울음소리를 타고
달의 인력(引力)이 마음의 심해에서 끌어 올린 부식된 선체가 떠다닌다
선체에서 떨어지는 잔소리들 늙은 재봉틀 한 소쿠리 진통제
그리고 남묘호랭교 남묘호랭교.....
달동네처럼 솟아오른 등에서 흘러나오던 독경 소리
어린 조카를 업고 다니던 등 따뜻한 무덤 같았던 등
그때의 체온이 한평생의 유일한 온기였던 쓸쓸한 곱사등에서
흘러나오던 남묘호랭교 남묘호랭교.....
목이 쉰 독경 소리 귀뚜라미 소리와 섞인다
달이 이마에 닿는다






# 이중도 시인은 1970년 경남 통영 출생으로 1993년 <시와시학>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통영>, <새벽 시장>, <당신을 통째로 삼킬 것입니다>, <섬사람>, <사라졌던 길들이 붕장어 떼 되어 몰려온다>가 있다. 데뷰 이후 한동안 작품 발표를 하지 않다가 뒤늦게 시심이 발동하여 열심히 시집을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