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여정사를 듣다 - 안숭범

마루안 2020. 1. 10. 21:55



여여정사를 듣다 - 안숭범



언 겨울을 눕히기 위해 찾아 들른 여여정사


싸락눈은 먼 산부터 흔들어 재우고
화석이 된 재즈 몇 개만 여기를 뒤적인다
길섶에선 누군가의 퇴비가 되면 좋을 시간이 쌓인다
내가 저녁으로 숨어드는 광경을 겨울새가 지켜본다
눈동자를 들키지 않는 동자승들은 알지도 모른다
풍경을 곤경으로 돌이킨 건 당신이 아니었다
지금은 오랜 우리의 疼痛(동통)을 음악으로 유배 보내기 좋은 시간
산을 좋아하지만, 다른 산에 박수 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작은 바위도 우회하는 냇물 곁에 살았다


사리 같은 눈송이 사이에서 싸락싸락 돌이키는 걸음을 들킨다
다른 길 쪽으로 나를 몰아세우는 겨울이
나였을까, 바람이었을까



*시집,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 문학수첩








정전 - 안숭범



정전이 왔다. 저녁 뉴스 아나운서의 클로징 멘트 즈음에서, 오늘에 배신당한 생계가 돌아눕던 중이었다. 어둠을 사이에 두고 이편과 저편이 사라졌다. 일찍 잠든 아이가 중도 해지 적금통장처럼 잠을 깼다. 뼈마디가 갑자기 날카롭게 벼려졌다. 최저시급 협상 부결 소식을 들은 어느 노동자처럼, 바닥에 배를 깐 금붕어는 어둠을 휘젓고 있었다. 나를 등지고 눈을 비비던 아이는 끝내 울었다. 더듬더듬 문이 우리를 열었다. 손전등을 들고 계단을 내려서는 인생들끼리 밀고 밀리면서, 엘리베이터에 갇힌 여자 둘은 무사했다. 아이는 금새 손전등과 아빠 신발 한 짝으로 놀이를 시작했지만, 사소하게 반짝이는 세계를 향해 나방만 날아다녔다. 소방차와 경찰자와 응급차가 육박해 왔지만, 분명히 전기를 기다렸는데 결국 무엇을 기다리는지 잊어버렸다







# 한동안 인연이 닿지 않았던 시집을 들춘다. 그의 첫 시집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어떤 평론가는 꽤나 극찬을 했으나 나는 천성이 평론가 말을 믿지 않는 청개구리다. 재능은 있으나 나와는 궁합이 안 맞는 시인이라는 생각을 했다. 며칠 전에 그의 영화 평론집을 읽고 나서 두 번째 시집을 읽었다. 놓치기 아까운 시가 여럿이다. 만날 시는 어떻게든 만나기 마련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