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환멸의 밤과 인간의 새벽 - 안숭범

마루안 2020. 1. 8. 22:27

 

 

 

가격이 2만 원을 넘어가는 책은 사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하고 있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 1만 5천 원이었는데 높여 잡은 가격이다. 고물가 시대에 책 만드는 사람은 흙 파먹고 사느냐고 힐난하는 사람도 있겠다. 어쨌든 1만 원에 살 수 있는 시집 빼고는 책값이 항상 부담스럽다.

경제적 사정이 가장 크다. 며칠 전 책방에서 책을 고르고 고르다 금액에 맞춰 딱 두 권만 들고 계산대에 간 적이 있다. 어떤 스님이 앞서 계산을 하고 있다. 뒤에서 보니 열 권이 넘는다. 20 만 원이 넘는 책값을 카드로 척 계산하는 스님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나는 책 많이 읽는 사람보다 책 많이 사는 사람을 더 부러워한다.

저 분은 나처럼 죽어라 일하는 대신 염불만 하는데도 저렇게 책을 많이 살 수 있다니 공연히 질투가 났다. 사다 놓고 미처 못 읽은 책이 여럿이면서도 막상 책을 보면 지나가지 못한다. 읽고 싶은 책은 많고 돈은 넉넉하지 않고, 늘 책방에서 하는 고민이다.

이 책은 2 만원이 넘는 가격에 한참 고민을 했다. 가능 하면 동네 책방에서 사려고 하나 어쩔 수 없이 인터넷 주문을 했다. 몇 권 더 주문하면서 이런 저런 혜택에 묶음 배송으로 간신히 2만 원쯤 되는 가격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쪼잔하게 산다.

이렇게 쪼잔하지 않으면 매일 편의점 삼각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거나 분식집 라면을 먹어야 한다. 책 욕심 때문에 먹고 싶었던 맛난 점심을 침만 삼키고 넘어간 날들이 수두룩하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이 쪼잔함을 버리지 못랄 것이다.

어쨌든 비싼 책을 본전 생각 안 나게 열심히 읽었다. 저자는 안숭범 시인이다. 이 양반 시는 나와 인연이 없었는데 영화 평론은 읽을 만했다. 평론가 특유의 문장이 다소 어렵긴 해도 술술 읽힌다. 보는 영화가 아닌 읽는 영화의 진수를 느낀다.

이유는 이 책에 언급한 영화를 대부분 봤기 때문이다 희한하게 두 편 빼고는 전부 봤다. 그것도 아주 감명 깊었다. 저자와 나는 영화 선택에서 코드가 맞은 것이다. 다른 점은 영화를 대부분 극장에서 봤던 나와 달리 저자는 DVD로 본 영화가 많다는 점이다. 

나이가 젊어서(저자는 1979년 생이다) 책에 언급한 영화 대부분이 그가 어릴 적에 개봉한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영화와 관련된 글을 많이 읽은 탓에 그것을 감지하는 촉이 발달했다. 그렇다고 모든 영화를 꼭 극장에서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긴 왕가위와 앙겔로풀로스의 영화가 언제 적 개봉한 작품들인가. 어쨌든 공감이 가는 안숭범의 영화 비평에 푹 빠질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지아장커, 켄 로치, 이창동 감독의 영화 비평은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라 더욱 흡인력 있게 읽혔다.

한때 가슴을 파고 들던 오래 전 시집을 다시 뽑아 읽는 심정과 꼭 같았다. 시인으로(2005) 먼저 등단하고 영화 평론으로(2009) 등단했는데 그는 영화 평론이 더 맞는 듯하다. 인연이 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던 이 양반 시집을 이참에 다시 읽어 봐? 불치병인 나의 책 욕심이 다시 꼬리를 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