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어찌 상스러운 글을 쓰려 하십니까 - 정재흠

마루안 2019. 12. 31. 22:23

 

 

 

책 제목이 다소 선정적이다. 요즘 하도 제목 가지고 독자를 현혹하는 책이 많아서 그런 종류의 책이겠거니 했다. 인터넷 뉴스 또한 제목으로 클릭하게 만들어야 하기에 제목 장사에 혈안이 되어 있다. 어리숙하면 그런 뉴스에 당한다.

책도 제목 보고 골랐다가 낭패 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서점 가지 않고 주문하면 그럴 듯한 제목이나 광고에 낚이기 십상이다. 내가 믿을 만한 작가 아니면 서점에서 책을 직접 들춰 보고서야 까다롭게 선택하는 이유다.

이 책의 제목은 한글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사대부들이 임금에게 올린 상소에 나오는 글이다. 그동안 대대손손 중국 역사를 배우고 중국을 받들면서 잘 살아 왔는데 어떻게 조상의 문자를 버리고 상스런 한글을 만드냐는 항의다.

지금과도 비슷하다. 말로는 주권자를 받들고 민중을 위해 일하겠다지만 뒤로는 잇속 챙기면서 성추행 등 나쁜 짓도 저지른다. 국회나 검찰 등도 그 좋은 머리로 열심히 시험 쳐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지들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하다.

세종 때도 그랬다. 한문이 남의 글이고 배우기도 어려우니 쉬운 우리 글을 만들겠다는데 기득권자들은 결사 반대했다. 글자는 지들만 알아야 하고 민중이 알면 마음 대로 속이지 못할 거라는 조바심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한글이 만들어진 세종조부터 대한제국 때까지 우리 교과서의 변천사를 정리한 책이다. 이 책 또한 저자가 궁금했다. 한글 학회가 있고 한글 박물관도 있지만 과연 그런 곳의 활동이 국민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가 의문스럽다.

책을 쓴 정재흠 선생은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이런 책을 썼다. 문학 박사 과정을 마친 회계사라고 보면 되겠다. 어쨌든 한글 학자가 아닌 사람이 이런 글을 쓴 것은 우리 글에 대한 저자의 무한한 사랑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면 그걸 느낄 수 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닌 스스로 마음에서 일어난 절박한 공부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책이다. 한글이라는 말도 1910년대 초 주시경 선생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이전에는 정음, 언문, 국문, 조선어 등으로 불렸다.

 

심지어 아녀자들이나 배우는 천한 글이라고 암클이라고 했다. 예전 학교 다닐 때 국어 시간에 고문은 띄어쓰기도 없고 참 읽기 힘들었다. 지금처럼 맞춤법이 완성된 것도 50년 남짓이다. 이런 천대 속에서 우리 글이 살아 남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이 책을 통해 이봉운이라는 학자를 알게 된다. 갑오개혁 이후 한글로 된 최초의 배움책 <국문정리>를 쓴 분이다. 이봉운 선생은 역관을 했을 것으로 추정할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분이다. 숨어 있는 학자라고 해야겠다.

저자는 음악, 수학, 생물 교과서 등 우리 교과서 변천을 차례로 다루고 마지막에 1907년의 초등지리인 <초학디지>를 언급한다. 거기서 대마도가 원래 우리 땅이었다는 부분이 나온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 우기는 현실에서 놀라운 기록이다.

어렵게 지켜온 소중한 우리 글인데 요즘의 한글은 영어에 심하게 오염되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580년 전에 <어찌 상스러운 글을 쓰려 하십니까>에서 백년 후엔 <어찌 상스러운 국어를 써야만 했습니까>라는 책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언어라는 것이 망가지기는 쉬워도 복원은 힘들다. 교과서 정책 딱딱하지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