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름다웠던 추억을 들고 - 서범석

마루안 2020. 1. 8. 21:58



아름다웠던 추억을 들고 - 서범석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을 들고
아름답게 견디는 모진 겨울


갈대 제비쑥 과꽃 쑥부쟁이  
시들고 마른 꽃잎 버리지 못하고
밤볼에 샛별눈은 검은 뼈대뿐


누구나 꽃피던 시절이 있었지
눈꽃바람 불어도 버리지 못하는



*시집, 짐작되는 평촌역, 황금알








딱따구리 경전 - 서범석



굵은 소금 같은 딱따구리의 끌밥
눈 위에 눈보다 선명하게
검은 나뭇잎 위에도 새하얗게 뿌려 놓은
땀방울같이 핏방울같이 고사목 아래 흩어진


얼마나 소중하면 거기에 하느님은 숨겨뒀을까
죽은 참나무 뱃속에 꾸물거리는 아기벌레
너의 입이 오랜 시간 터뜨린 탄착점 속
죽이기 위해 살아가는 너의 목탁소리를
아침마다 집으로 길게 끌고 오면서
엄청난 경전이나 새기는 줄 알았지


무서운 호랑이도 참새 한 마리 어쩌지 못하는 법
차원이 다르다는 거야, 를 헐값으로 가져와
없는 책상 위에 펼쳐놓고 흐린 눈으로 읽는다
기다리는 건 일찍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내 눈 속에 들어 있는 모기 같은 것
새털구름 같은 것
담배씨 같은 것
나는 어쩌지 못한다, 라고 뇌의 헛간에 심는 겨울






*시인의 말


자꾸 따라오는 겨울


두더지 같은 것들이 올라탄
지하 전동열차 임산부보호석의 손금
하늘이 알을 낳는 냄새
백합나무 꽃 익어가는 소리
노트북에 기어가는 배추흰나비의 고독
은행알에 미끄러져 쏟아진 정의와
사랑이 품절되는
나물이네 밥상으로부터
스마트폰 문자를 타고 전송되는
-네가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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