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림자는 자라고 - 김시종

마루안 2020. 1. 7. 19:36



그림자는 자라고 - 김시종



거기에선 아직 그림자가 길게 자라고 있다.

물가로 가는 닫힌 길에서 흐느끼는 것은

우뚝 솟은 벽 저편에

통곡의 벽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저물어가는 거리에서

누군가가 지금 시계를 보고 있다.

아무래도 올 사람이 오지 않음은

내가 여기에서 이유 없이 지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서진 벽 그늘에

지금 눈물에 잠긴 가족이 있다.

구획된 세계에서 울고 있는 사람은

눈물을 잃어버린 나를 울고 있는 것이다.


얼어붙은 강가를

지금 사람의 그림자가 기어가고 있다.

국경의 끝없는 밤을 건너가는 사람은

이 뻔뻔한 나를 향해 걷고 있는 것이다.


징글벨도 울림을 멈추고

다들 귀로를 서두르고 있다.

해(年)는 기울어 그림자는 길어지고

머나먼 거기에서도 나의 어둠은 넓어져간다.


지금 다시 신년은

나의 등 뒤에서가 아니면 눈 뜨려고 하지 않는다.



*시집, 잃어버린 계절, 창비








이 무명(無明)의 시각을 - 김시종



차폐(遮蔽) 없는 관문을 넘어

해(年)는 오는가

해는 가는가

저기 남겨진 채

산감(山枾)이 가지 끝에서 해를 넘기면

굶주림은 떨리며

새가 되는가

흙이 되는가

아니면 박명(薄明)의 해를 빠져나와

어딘가 여윈 땅에 거꾸로

실려온 목숨도 바람이 되는가

구호만 나부끼는

얼어붙은 황토의 위대한 나라에서는

어디의 무엇에 봄이 숨 쉬고

굶주린 솥은 무엇을 삶으며

연기를 내고 있는가 끓고 있는가

관문 없는 시공을

세월은 기류(氣流)처럼 흘러

마침내 돌아오지 않을 것을

그래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멀리서 목청껏 외치고 있는 사람이여

잔해에 죽은 자들이 모이는 저녁밥 때쯤

그나마 소리 높이 서쪽 해가 타고

마을에 활활 불을 지피고

해가 가는가

해는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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