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줄 映

집 이야기 - 박제범

마루안 2020. 1. 6. 19:32

 

 

 

서울에서 신문사 편집기자로 일하는 은서와 가족에게 마음을 닫은 아버지 이야기다. 살고 있는 원룸 계약 만기가 다가오자 은서는 점심 시간마다 이사할 집을 알아보러 다닌다. 이것이 맘에 들면 저것이 걸리고 번번히 맘에 드는 집을 찾지 못한다.

수십 군데 함께 다니다 중개사 아저씨도 포기한다. 살 집을 찾지 못하고 계약이 끝난 은서는 새집을 구할 동안 잠시 머물 요량으로 고향인 인천 집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아버지가 이혼 후 혼자 남아 24시 열쇠 수리공으로 일하고 있다.

현관문, 방문, 창고, 금고 등 세상의 별의 별 잠긴 문을 다 열 수 있지만 가족의 마음 만은 열지 못한 아버지였다. 외고집 때문에 아내도, 딸들도 모두 떠났고 아버지는 아파트 하나 사지 못한 채 가족과의 추억이 서린 낡은 집에서 쓸쓸히 살고 있다.

은서는 수리도 하지 않고 창문 없는 방에서 혼자 사는 아버지가 답답할 뿐이다. 오랜 만에 함께 지내면서 티격태격 부녀 간은 삐걱대기만 한다. 변화를 거부하며 아날로그 세상에 머물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 속 상처는 무엇일까.

영화는 집 이야기답게 여러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은서의 원룸, 절친의 반지하 방, 재혼한 엄마의 제주 신혼집, 지방 신도시에 사는 언니의 아파트 등이다. 친구가 사는 반지하 방의 쪽창, 제주 엄마 집은 벽 전체가 통유리여서 바다가 훤히 보인다.

아버지가 사는 집만이 창이 없다. 대신 오래된 달력에서 오린 바다 그림이 창문처럼 벽에 걸려 있다. 공간과 사물의 배치가 감독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옴을 알 수 있다. 서울, 인천, 제주, 그리고 집, 열쇠, 창문, 가방, 귤까지 상징성을 가진다.

아버지는 엄마와의 추억 때문에 귤 그림이 그려진 오래된 냄비를 여태 사용하고 있고 재혼한 엄마의 집에는 곳곳에 귤이 놓여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래도 소원했던 가족에게 마음은 조금 열고 떠났다.

아버지의 관을 고르는 은서, 그렇게 까다롭게 집을 보러 다녔고 아파트 장만을 위해 평생 허리가 휘는 작금의 현실에서 영화는 아버지의 관을 클로즈업 한다. 무엇을 상징할까.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다. 마지막 머물 곳은 1평짜리 관이다.

모처럼 괜찮은 영화 하나 만났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기억 상실에 걸리고 어느 날 딸이 사라지고 복수를 위해 피바람을 일으키고 폭력과 욕설이 난무한 영화에 길들여진 관객은 재미 없을 것이다.

영화가 예술이기 앞서 자본이 투입된 비지니스임은 맞다. 그렇더라도 심심풀이 땅콩처럼 오락으로만 소비된다면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예술성과 함께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인지를 저절로 깨닫게 해주는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