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당신의 북쪽 - 전형철

마루안 2019. 12. 26. 22:57

 

 

당신의 북쪽 - 전형철


운명을 조판하는 사람이
빙하구혈 속에서 반짝인다

고요가 잠시 몸을 떨었으니
다음의 고요는 고요가 아니다

지난 것들을 떠올리는 일은
사건을 목격한 벙어리의 증언 같은 것

저녁을 발굴하다 우연을 떠올리는 시간
새들은 숲을 태워 한 줌의 재를 만든다

공중에 흩날리는 살점들
사람은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눕는다

백야의 간빙기 같은
오로라는 하늘구멍 속으로 빨려든다

당신의 나침반이
어제처럼


*시집, 고요가 아니다, 천년의시작


 

 

 


동대문 접골원 - 전형철


사대문의 결계를 따라 걸어요
머릿속에 털뭉치를 키운 절지동물들이
빗방울 맺힌 소인을 하늘에 대고 찍어요
먼 곳에서 물어 왔어요
끊어진 소식이나 어긋난 인연, 무너진 성벽
알을 잃은 가로등
듬성듬성한 마디들에게 들었지요
별을 더듬으면 뭇별,
조무래기 힘줄 길을 잡아 주면
별자리의 이름이 되나요
땅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나 봐요
산맥의 뼛조각들이 빠드득
들썩이는 소리가 들려요
하늘에도 바닥이 있나요
목발을 짚지 않았는데 새들에게 소리가 나요
귀를 막아도 결절은 소리가 있고
눈이 멀어야 혈맥도 잡힌다지요
접골목은 시누대
꽃이 피었으니 이제
아문 기억은
도시의 나선 은하 속으로 빨려 들겠죠
바람의 끄트머리, 즐비한
나무 뼛조각들 사이로
간판이 깁스 없이 붙어

 

 

 

 

# 전형철 시인은 1977년 충북 옥천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2007년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고요가 아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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