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둠이 따뜻하다 - 권천학

마루안 2019. 12. 26. 22:49



어둠이 따뜻하다 - 권천학



두고 온 그리움이 있었던가
커피향 번지는 창가
밀려오는 어둠 속으로
하나 둘 불 밝힌 마을이 떠오르고
안개 속으로 떠나보냈던 것들이
멀고 아득한 곳에서 또한 아득하다


지워져 가는 풍경 속으로 가만가만 들어가
여기저기 매케한 먼지를 털어내면
풍경 속 그림들이 되살아나 가지를 뻗고
희미해진 이름들이
박제된 채 걸려 있는 액자를 뚫고
넝쿨지게 손을 내어민다


젊음이 두려워 가슴 조였던 골목길
사랑이 두려워
뒷걸음으로 도망치던 그 골목길로
또다시 사랑이 찾아오면
잊지 않고 찾아오면
그 어둠에 묻히리라
반가운 손님처럼 이제는 안기리라


그윽하게 고여 있던 시간만큼
그윽하게 다가오는 저녁
떨리는 손으로 심지 올리면
울먹울먹 어둠도 따뜻해진다



*시집, 노숙, 월간문학사








삼재(三災) - 권천학



마(魔)의 아홉수가 그냥 지나가 주지 않을 기색이다
전생에 살인자였다면 끌끌끌
제 앞의 삶을 아파하면서 즐기고
술자리마다 뜨거운 피를 못 이겨
술병보다 먼저 술상 위에 뒹굴던,
상처의 찌걱거리는 고름을 손톱 밑에 숨기고 있던
그 애가 쏘는 배신의 총
다음 번엔 뱀이 될 모양이다


손톱을 세우고 심장에 고인 푸른 독을 내뿜는다
가까이 했던 시간들을 향하여
발끈 돌아서서 날름 갈라진 혀로 침을 뱉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피 흘리게 한 돌멩이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번이 마지막 돌멩이가 되길


그 이름 위패로 내다 걸고
머리카락 태운 연기를 피워올린다


그렇게 나로부터 죽어 간
아홉수 액막이로
뱀이 된 그 애의 영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