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위하여 - 박일환

마루안 2019. 12. 26. 21:57



위하여 - 박일환



술자리만 가면 건배사를 외치는 이들이 있지


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개나발
변함없는 사랑으로 내일 또 만납시다, 변사또
마주 앉은 당신의 발전을 위하여, 마당발
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위하여, 당나귀
당나귀를 타고 온 오바마도 있으니
오 바라만 봐도 좋은 마이 프렌드!


그래도 가장 흔한 건 단순하게
위하여!
위한다는 말, 참 좋은 말이지


하지만 삐딱한 걸 좋아하는 나는 종종
위하지 말자는 말을 내뱉곤 하지
그 많은 애주가들이 주구장천 '위하여'를 외치고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하고 경제를 위하고 환경을 위하겠다는 정치인들이 줄을 섰는데
세상은 왜 요 모양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을 때가 있지
그냥 냅둬!


인간이 무얼 위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망가져간 수많은 것들을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는 혼자서 열심히 돌고 있지, 인간이 도와주지 않아도!



*시집, 등 뒤의 시간, 반걸음








신장개업 - 박일환



못 보던 간판이 하나 더 늘었다
그 자리에 먼저 있던 간판과
거기 의지하던 누군가가 사라졌을 테고
신장개업을 축하하는 화분이 들어선 자리에는
예전에도 같은 화분이 놓여 있었겠지


신장개업을 알리는 전단지는 넘쳐나고
간판이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눈물겹지만
언제 툭, 떨어져 내릴지 모르는 일
망하는 길이라도 눈앞에 놓인 길이 오직 그 길이라면
벼랑을 안고서라도 가야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추락을 공포를 감추기 위한 미소와 함께
어서 오십시오, 친절하게 모시겠습니다
활기찬 목소리가 신장개업 안내판을 산뜻하게 감싼다


허리를 숙이는 일의 경건함에 대한 경구를
오래전에 읽었으나
허리가 꺾이는 일의 참담함은 애써 피하곤 했지


세상은 날마다 '새롭게'를 외치지만
제아무리 새로운 이스트를 넣어봤자
공갈빵은 그냥 공갈빵일 뿐이니


신장개업이 폐업의 예고편이라는 사실을
차마 발설하지 못하는 착한 이웃들이, 쉿!
다 함께 입술에 검지를 갖다 붙인다






# 박일환 시인은 1961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푸른 삼각뿔>, <끊어진 현>, <지는 싸움>, <덮지 못한 출석부>, <등 뒤의 시간> 등이 있다. 전교조 해직 교사이기도 했고 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30년에 걸친 교사 생활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