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별다방 - 이원규

마루안 2019. 12. 18. 22:40



별다방 - 이원규



저 멀리 빛난다고 다 별빛은 아니었네

점촌 역전 골목의 지하 다방

그녀의 청보라 스웨터에 별들이 반짝거렸지

한번 불붙으면 펄펄 뛰는 팔각 성냥갑 

달달하게 녹기 전에는 날 세운 각설탕 


오빠야, 내도 차 한 잔 마실게

옆자리 앉자마자 허벅지 쓰다듬으며

근데 얼굴이 캄캄한 오빠는 뭐 하는 사람?

나야 뭐, 지하 막장에서 벼, 별을 캐지

아, 죽어야만 2천만 원짜리 그 막장 꺼먹돼지!

그래 그래 별마담, 커피 두 잔 부탁해 


철없는 시인이 되었다가 폐광하고

경제학 원론을 불태우던 그 시절

지하 1층 별다방에서 별똥별을 보았지

밤마다 9톤의 별들에게 다이너마이트 터뜨리며

지하 700미터 막장에서 운석을 캐냈지

오후 네 시에 팔팔 항목으로 들어가 

자정 무렵 시커먼 포대자루로 기어 나오면

코피처럼 폐석처럼 쏟아지던 별빛들 


세상도 나도 너무 밝아져 다 식어버렸네

지천명 넘어서야 밤의 지리산 형제봉 

해발 1100미터 산마루에 홀로 누워 

아득하고 아련한 별빛들을 소환하네

아주 가까이 빛나던 것들은 모두 별빛이었지



*시집, 달빛을 깨물다, 천년의시작








가출 - 이원규



탯줄도 없이, 모든 출가는 가출의 자식이 아닌가

고교 일 학년 봄 소풍 때

산죽 밭에서 보물찾기 하다가

해발 팔백 고지의 만덕사로 사라진 나도 그렇고

지리산 외딴집에 잘 살던 수탉마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으니

지난밤 살쾡이에게 목울대 내주었거나

거짓말처럼 훨훨 야성의 새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출출가는 또 가출의 손자

삼 년 전에 집을 나간 뒤

여태 돌아오지 않은 잡종 사냥개 산이는

제 이름을 따라 입산 들개가 되었거나

19번 국도 질주의 스포츠카 앞바퀴에 치였거나

보신탕집 감나무 아래의 소신공양으로

누군가의 불콰한 정력이 되었거나


분지의 대구 문청 시절의 그날 새벽

허물을 벗듯이 자취방을 나간 스물두 살 애인은

삼거리 포장마차에서 그 누군가를 만나

사내란 사내는 다 똑같은 놈!

취한 척 아무하고나 신접살림을 차렸거나

탯줄도 없이 가지산 어느 암자에 들어가

오늘도 철없는 나를 위해 기도할지 모르지만

가출 않았다면 부처나

예수도 별 볼일 없는 사내였을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 시를 읽는 

당신이나 나나 집 나온 지 참 오래됐구나






# 흑백 필름으로 들여다 본 것처럼 시로 읽는 시인의 자서전이라 해도 되겠다. 만 년 전에도 천 년 전에도 세상에 나왔다 간 모든 사람의 인생은 우주적이다. 아득하고 아픈 추억도 돌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시인처럼 지천명을 지나면서 안 가본 미래보다 지나온 추억을 더 돌아보게 된다.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기보다 이런 시를 읽을 수 있다면 지낼 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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