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람은 흩어지고, 쌓인다 - 김시종

마루안 2019. 12. 10. 22:57



사람은 흩어지고, 쌓인다 - 김시종



갑자기 날이 저물고

어딘가 먼 곳에서 구급차가 발을 구른다

몇겹이나 되는 구름을 재빨리 건너가는 바람,

서서히 물들어가는 거리의 등불.

사람들은 귀로의 계단을 다투어 내려오고

능선을 그리는 최후의 햇빛 한줄기

해 뒤로 도시를 끌고 간다.


갑자기 저문다.

밤마다 동네에서는

그리운 얼굴이 흩어지고, 쌓인다.

잠 속에서도 소리 없이 웃음 지으며

기억의 흔적을 흩뿌리며 온다.

하나하나가 불면의 덩어리이다.

이 시커먼 백년을 앞에 두고는

어느 누구든 자신의 후회를 곱씹지 않을 수 없다.


집들 사이로 바람이 흐느낀다.

잔상마저 남기지 않고 해는 저문다.

남겨진 생애처럼

떨어질 듯 과실 하나 높은 가지 끝에서 떨고 있다.

집집마다 슬그머니

돌아가는 시간을 멈추어두고

거리의 황야에 흩어지고, 쌓이는

아아 그리운 사람들,

어렴풋이 등 뒤에서 희미해져가는

아아 돌아갈 곳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그림자.



*시집, 잃어버린 계절, 창비








기다릴 것도 없는 8월이라며 - 김시종



여름이 번쩍이는 일은 이제 없을 거라며

온통 투명해진 시절이기에

더구나 두근거릴 일일랑 여름에는 더이상 없을 거라며

그래도 그는 무구한 얼굴로 혼자 있는 나를 엿본다.

튀어오르던 청춘도 기둥이었던 사회주의도

당사자 본인이 부순 지 오래인데

잠들지 못하는 아내의 마음 하나

갇혀서 살아온 건 오히려 자신이건만

못내 신경이 쓰이는지 주의 깊게

내 눈치를 힐끔 살핀다.


지울 수 없는 여름도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기다림의 끝 그 안간힘이

멀쩡한 나의 정신을 끊임없이 거슬리게 하는

그의 적반하장이

질리지도 않는지 여전히 강한 척하면 할수록

나의 체념도 안색을 바꾸어 입을 삐죽거린다.

아직도 여름은 욱신거림 속에 있는 거라며

나는 마구 분별을 잃어간다.


그럴 만큼 깊이 박힌 기억 때문에

희미해진 기억만이 남았기에

빛나던 여름날의 밑바닥에서

여름은 산산조각 나버렸기에

여름은 파편 박힌 기억이다.

주춤할 틈도 없이 여름을 밝아져서

겨우 잠든 아내의 잠든 숨결에

나도 함께 눈을 깜박이며

헛기침을 섞어가며

이유 없이 치미는 것을 삼켜 누르고는

새벽에 하얗게 희미해진 눈으로

그래, 여름은 아직 목이 메어 있는 거라고

외면하는 그에게 거듭 되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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