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도로 외로워졌을 때 - 이생진
극도의 외로움에 시달려도
나는 보복하지 않겠다
새봄에 새살림을 차리는 화려한 봄기운과
갈대밭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 흰 고무신
나는 실종 신고를 유보하고
기웃거리기만 했다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더 무서웠다
그런 신발 못 봤다고 했다
외로움이 책임 소재로 바뀌는 밤
식은땀이 등골을 지나갔다
그때부터
고독은 질병인가
아니면 범죄인가 혼동하기 시작했다
*이생진 시집, 무연고, 작가정신
실수 - 이생진
실수란 손(手)을 잃(失)는다는 말이다
나는 몇 해 전에 손을 잃었다
수전증
손이 흔들려 손 노릇을 못한다
커피 잔을 들면 그 손이 흔들려 커피가 넘어지고
밥을 뜨면 손이 흔들려 밥이 넘어진다
아이들이야 덜 자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나는 다 자라서 그러니 철은 들어 있다
이것을 내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억울하다
하지만 너무 살아서 그러니
그것도 고맙게 여기자
이렇게 말하고 커피 잔을 일으켜 세운다
커피 잔이 어른처럼 점잖다
# 시집 제목이 마음에 든다. 예전에는 오만가지 이유를 들어 이런저런 끈으로 연결하고 싶었다. 지금은 가능한 끈을 연결하지 않는다. 되레 있는 끈도 하나둘 정리하는 중이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한다. 노 시인의 시도 많은 걸 비웠다. 빈 곳에서 향기가 난다. 나도 훗날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지금의 건강도, 편안함도 내것이 아닌 남에게 뺏은 것임을 가슴에 담고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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