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겨울의 호흡 - 이은규

마루안 2019. 12. 11. 22:01



겨울의 호흡 - 이은규



달력 한 장을 뜯어 동그랗게 말면
겨울을 향해가던 숫자들이 멈출까
소매 속으로 숨어들까


아름다운 숫자들, 겨울에 가까운 가을이 구름 근처를 서성인다 어떤 기억은 잊었다고 말하는 순간 더 또렷해지고


찻잔을 저으며 떠올리다
녹는점이 서로 다르다는 건
타인의 취향만큼 가깝거나 멀고
어는점이 같다 해도
다행이거나 다행이지 않을 뿐


기억나는지, 호흡 한 점에 빙벽의 온몸이 녹아내리던 풍경이 있었다 오늘은 웅크린 그림자조차 얼어붙게 하는 그날의 호흡


얼음이 녹는 온도에서 눈물은 언다


외로움만큼 가파른 절벽이 있을까
베개 밑 시집에서 들리는 문장
문득 숫자들의 정교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벽을 오르다 빙벽을 만날 가능성에 대해
찻잔을 젓다가 스푼이 녹을 가능성에 대해


불가능의 가능성을 오래 꿈꾸다


지나간 구름을 다시 만날 수 없는 세계에서
절벽을 부수고 그 안에 든 빙벽과 마주할 것
물에 녹는 물질로 스푼을 만들어 찻잔을 저을 것
푸른 빙벽을 바라볼 수 있도록
찻잔 속 사라지는 스푼을 바라볼 수 있도록


호흡인 듯 스미는 겨울처럼
눈을 찌를 문장, 구름의 행간에 새길 수 있을 때까지



*시집,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문학동네








문진 - 이은규



당신 없이도 바람이 분다
창가에 머무는 한 점 모빌 날아오를 듯, 날아오를 듯
저 새는 지금 투명으로 건너가는 중


흰 종이 한 장 펼쳐
검은 돌을 깎아 만들었다는 둥근 문진을 놓는다
안부라는 단어를 적지 않도록 노력하기
이 문진도 어느 날엔 모난 돌이었을 것


내 잠의 길목까지 배웅 나와
찡그린 미간을 쓰다듬던 한 사람의 손길이 있었다
모든 흔적은 지문의 소관


생일 선물을 건네며 당신은 말했다
그렇게 얇은 종잇장 같은 가슴으로 어떻게 살아갈래요
검은 돌이 하도 예뻐 오래 매만졌어요
잠시 웃는 돌이었나 눈부신


이제 고단한 잠이 벼랑 끝까지 내몰려도 도리가 없다
호- 하고 불어주던 입김이 사라졌으므로
검은 돌을 가슴에 올려놓고 잠을 청하는 날들


출처 잃은 기억만이 날아가는 법을 잊었다


검은 돌을 심장에 대고 문진을 한다
병력을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노력하기
밤의 끝에 선 그림자를 향해 당신이 묻는다
아픈 곳들 중에 가장 아픈 곳이 어디인가요


흰 종이가 투명해지는 동안
안부의 문장을 입에 문 새가 날아오를 듯, 날아오를 듯
그러나 기억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날개


검은 돌을 왼쪽 가슴에서 오른쪽으로 옮길 때
지구가 잠시 기우뚱하는 순간
지축을 울리는 한 사람의 안부를 맞이할 것이다






# 이은규의 시를 읽다 보면 읽을수록 시를 참 잘 쓰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으로 조용히 읽을 때도 나긋나긋 혼잣말처럼 낭송을 해도 눈과 입에 착 감기는 시다. 시 쓰는 내공도 세월만 흐른다고 쌓이는 것이 아니다. 잘 읽히면서 울림을 주는 시여서 여러 번 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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