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시계 - 박소란

마루안 2019. 12. 5. 22:05



시계 - 박소란



움직이고 있다 아직 살아있다니


아직은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지


퍽 강한 사람이군요, 하는 말을 들을 때면
안심이 돼 그럴 때면
표정을 더 덤덤하게 담담하게


다리를 움직여 길을 걷고
팔을 움직여 밥을 먹어
한번쯤 이 팔로 누군가를 껴안을 수도 있다지만
그렇지만


움직이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
그런 게 중요하지
낮이나 밤이나 잠든 척 자세를 가다듬는 새벽이나
숨 쉬고 있는 것


괜찮아? 물으면
괜찮아 대답하기 위해


아직 살아 있기 위해


아무도 내가 몇시인 줄을 모른다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








끈 - 박소란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있다


짐짓 골똘한 표정으로
헐거운 매듭을 만지작대며 답을 미룰 수도 있다


나는 지금
교외로 향하고 있다 버스는 이상하리만큼 굼뜨고
창밖 도로변에는 꽃들이 빽빽이 심어져 있다 이상하리만큼
눈이 부셔


슬며시 훔쳐다 감거나 묶을 수도 있다
괴성을 지르며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은 아닐 수도 있다
엉클어진 시간을 풀 수도 그냥 내버려둘 수도 있다


적당한 크기와 모양으로 조각을 내어
아무 바닥에나 던져버릴 수도 있다
오래 벼린 칼이 있고 마침 칼은 가방 속에 있고


나는 지금
교외로 향하고 있다 끈과 칼은
이상하리만큼 닮았고


끊을 수도
더 잘 끊을 수도 있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