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놀라운 노동의 가치 - 이철산

마루안 2019. 12. 12. 22:27



놀라운 노동의 가치 - 이철산



파업이 끝나자 처음 알았지 우리 노동의 놀라운 가치
삼십 년 동안 한 달 이백만 원 남짓 고스란히 모아도 어림없는
한 달 파업의 가치 놀라운 가치
수백 억 손해배상 청구서와 수십 명 해고통지서
처음 라인을 멈추고 기계를 멈추고 공장을 세우고
공장을 지키면서 시작한 싸움 한 달 동안의 파업
손때 묻은 기계를 세우고
몽키스패너 대신 노동조합 깃발을 들면서
우리가 요구했던 것은 최저생계비와 일자리 보장
재벌들이 경제를 망쳐도 노동자 탓
비리와 부정으로 세상이 썩어도 노동자 탓
평생 공장에서 일만 했던 노동자 탓
세상 허물 다 노동자 탓이라 몰아도 눈감았지만
삼십 년 노동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는 세상
쫓겨난 자 노여움에 공장 앞을 떠나지 못하고
남은 자 부끄러움에 쫓겨 돌아가는 오늘
우리는 몰랐네
평생 부품에 묻혀 기름때에 절은 노동의 가치
모두가 외면했던 우리의 가치
하루를 멈추고
기계를 멈추고
세상을 멈추었을 때 비로소 존중되는 놀라운 가치



*시집, 강철의 기억, 삶창








공공근로의 위력 - 이철산



하수구가 뻥 뚫리고 길거리가 깨끗해졌다
골목마다 야간 순찰을 돌고 담벼락 낙서가 지워졌다
산등성이 잡목들이 잘리고 공장에서 기계가 돌아갔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낯선 변화가 골목에서 야산에서 공장에서
시작되었다 혁명의 아침이 고작 일당 4만 원에서 밝아 오는 것이다
평생 공사판을 떠돌았던 그의 낡은 손바닥과
한세상 버티다가 쓸쓸히 남겨진 그녀의 젖은 손바닥과
노동을 잃은 많은 청청한 손들이 스쳐 지나가는 곳마다
세상은 순간 아름다워졌다
고작 일당 4만 원으로 다시 시작되는 아침
이윤이 무너지자 다시 아름다워지는 노동






# 대를 이어(?) 기름밥을 먹고 있는 노동자 시인의 첫 시집이 깊은 울림을 준다. 온갖 문학적 수사와 이론에 밝은 게으른 시인보다 이런 시인이 훨씬 빛난다. 절망을 에너지로 삼아 강철 같은 시심을 가진 시인에게 나처럼 무식한 독자 하나쯤 손 흔들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