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숭고한 밥 - 김장호

마루안 2019. 12. 2. 22:05



숭고한 밥 - 김장호



어느 화창한 봄날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광장
폴리스라인이 잠시 숨을 고르는
점심시간,


한 끼 노동식량을 챙기려고
시위대는 준비해온 도시락을 까먹거나
손님 북적대는 중국집에서
자장면과 짬뽕의 쫄깃한 면발을 정신없이
감아올린다


한 끼 전투식량을 챙기려고
전경들은 진압봉과 방패를 내려놓고
저마다 김치제육볶음 식판 받아들고
차벽 옆에서 시위대를 지켜보며 우걱우걱
씹는다


한 끼 생존식량을 챙기려고
아침부터 밥차 앞에 줄선 사내들은
제가끔 오징어콩나물국밥 식판 받아들고
가로수 밑에 서로 돌아앉아 허겁지겁
삼킨다


한 사내가 첫술을 뜨려다 바닥에 던져준다
오늘은 올리브 가지를 물고 왔는가
비둘기가 와락 달려들어
쪼아먹는다


밥은 경전이다
우리는 한 그릇의 밥이다
줄서 탁발하고 보시하고 공양하는
시위대와 전경과 사내와 비둘기의 점심
두레상이다



*시집, 소금이 온다, 한국문연








서울역 비둘기 - 김장호



그 옛날 비둘기호는 영영 안 돌아오지만
비둘기 200여 마리의 후손들은
서울역 옛 역사에 둥지 틀었다
마지막 열차 떠나가고
서울역 벽시계의 발걸음이 가벼워지면
유민들은 광장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비둘기들은 역사 처마 밑에 잠잔다
다친 다리 싸매준 할아버지는
열차를 탔을까 그의 행방이 궁금한
멧비둘기는 다리 절룩이며
서울역 지하도를 선회하다 6번 출구에서
할아버지를 찾았다
할아버지는 암 진단금을 받아
막내 해외연수를 보내줬다고 그랬다고
한잔 술에 육자배기 한가락 뽑더니
구석에서 새우잠을 자고
멧비둘기는 할아버지 곁에 앉아
새우깡을 쪼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