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자작나무 숲 - 김창균
어느 한 시절
하루는 태생부터 생긴 옹이를 따라 갔고
하루는 자라면서 생긴 옹이의 후생을 따라 갔다.
또 하루는 몸피에 닿는 햇볕을 따라 갔고
하루는 몸피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햇볕을 따라 갔다.
샛길이 너무 많아 더는 갈 수 없는 길은
나의 누추한 사랑처럼 금세 어두워지고
일찍 생의 초입을 닫고 누운 저녁 숲에서
나는 사랑을 찾아 나서기에도
실연을 찾아 나서기에도 이미 늦어버렸음을
후회도 없이 받아놓네.
한때 애인이었던 여자를 느닷없이 난전에서 만난 듯
경황없이 말 더듬으며 가장 빛나던 시절의 이면을
무릎 위에 앉혀보는데
오늘도 그때와 같이
희고 단단한 빗줄기처럼 서서
당신은 아무 말이 없네.
온몸에 자작자작 흰 멍이 드네.
*시집, 마당에 징검돌을 놓다, 문학의전당
폐허, 점집 앞을 지나며 - 김창균
오래된 공장 지대나 빈집을 지날 때, 혹은
오래전 문 닫은 점집 마당을 지날 때,
인기척들이 떠난 곳은 모두 폐허인 줄 알았다.
출입문이 좁은 전통도 없이 낡은 식당에 앉아
국밥을 먹는 당신과 내가
가끔씩 메마른 말들을 주고받을 때
불쑥 머리를 치드는 것
붉은 잇몸을 드러낸 채
야생의 날숨을 쉬며 엄습하는
빛나는 폐허의 무리들
이상도 하지!
지칠 줄 모르고 솟구치는 폐허의 폐허에
뱉어놓은 욕설이 푸르디푸르게
증식하다니
발아하는 폐허여
나를 향해 주술처럼 일어서는 공포여
또 어느 날 인기척 없는 점집 앞을 지나며
실로 폐허는 살찌고
나의 휘파람은 야윈 것을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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