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녁 자작나무 숲 - 김창균

마루안 2019. 12. 2. 22:48



저녁 자작나무 숲 - 김창균



어느 한 시절


하루는 태생부터 생긴 옹이를 따라 갔고

하루는 자라면서 생긴 옹이의 후생을 따라 갔다.

또 하루는 몸피에 닿는 햇볕을 따라 갔고

하루는 몸피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햇볕을 따라 갔다.

샛길이 너무 많아 더는 갈 수 없는 길은

나의 누추한 사랑처럼 금세 어두워지고


일찍 생의 초입을 닫고 누운 저녁 숲에서

나는 사랑을 찾아 나서기에도

실연을 찾아 나서기에도 이미 늦어버렸음을

후회도 없이 받아놓네.


한때 애인이었던 여자를 느닷없이 난전에서 만난 듯

경황없이 말 더듬으며 가장 빛나던 시절의 이면을

무릎 위에 앉혀보는데


오늘도 그때와 같이

희고 단단한 빗줄기처럼 서서

당신은 아무 말이 없네.

온몸에 자작자작 흰 멍이 드네.



*시집, 마당에 징검돌을 놓다, 문학의전당








폐허, 점집 앞을 지나며 - 김창균



오래된 공장 지대나 빈집을 지날 때, 혹은

오래전 문 닫은 점집 마당을 지날 때,

인기척들이 떠난 곳은 모두 폐허인 줄 알았다.


출입문이 좁은 전통도 없이 낡은 식당에 앉아

국밥을 먹는 당신과 내가

가끔씩 메마른 말들을 주고받을 때


불쑥 머리를 치드는 것

붉은 잇몸을 드러낸 채

야생의 날숨을 쉬며 엄습하는

빛나는 폐허의 무리들


이상도 하지!

지칠 줄 모르고 솟구치는 폐허의 폐허에

뱉어놓은 욕설이 푸르디푸르게

증식하다니


발아하는 폐허여

나를 향해 주술처럼 일어서는 공포여

또 어느 날 인기척 없는 점집 앞을 지나며

실로 폐허는 살찌고

나의 휘파람은 야윈 것을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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