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칼새의 행로 - 천융희

마루안 2019. 11. 30. 22:21

 

 

칼새의 행로 - 천융희


착지를 모른 채

악천후에도 비상착륙을 잊은 듯

익숙한 기류에 전속력으로 내리꽂는
칼새의 부리를 본 적 있다
시작점과 도착점이 일치하는 행로는 오늘의 표정

때론 온몸을 파묻어
쌓아 올린 패지 더미만 기우뚱 길을 트는데
경로추적이 필요 없는 그를

좁은 골목을 여닫으며 쉴 새 없이 비행하는 그를
시장 사람들은 칼새라 손짓한다

먹이가 포착되면 그의 활강은 매우 민첩하다

패지가 던져지는 끝점마다 어김없이 발견되는 깃털들
생계로 구성진 바닥은
칼새의 일생 후퇴할 수 없는 요새이자
최전방이다

일몰 무렵
은행나무 아래 고도를 낮춘 쪽잠의 늙은 사내
깔고 앉은 그림자마저 노래지는 시간

농익은 은행알
툭, 바닥을 구를 적마다
희번덕거리는 깃털을 곤두세워 바람의 방향을 조절하는

저 홀로 쫓고 쫓기며


*시집, 스윙바이, 한국문연

 

 

 

 

 

 

균열의 발상 - 천융희


오래전 시작된 균열은 계속 진행 중으로 보인다

저것은 
속속들이 스민 생이 어쩌지 못하여 발설한 흔적

임대 아파트 외벽
수직으로 뻗치던 상처는
순간 돌발로 외벽을 통째 삼킬 태세다

단단하다고 끄떡없다고
독한 바람에도 뭣하나 놓치지 않던
끝내 속내를 들키지 않던 그녀

처방전 알약의 효능은 갈수록 다양해진다

위장(僞裝) 뒤 수북하게 쌓인 통증은
끝없이 번져가는 버짐 같다
한방이면 끝나버릴지도 모를 단절 같은

깊은 상처에 덧댄 무늬가
붉은 생채기로 읽히는 저녁 무렵
여백마다 바람을 들이킨 메타세쿼이아는
갈라진 틈으로 둥지를 품고 있다

계단을 빠져나오는 그녀
덜컥, 솟아오른 보도블록에 걸려

아찔하게 일어선다




# 천융희 시인은 경남 진주 출생으로 창원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11년 <시사사>로 등단했다. <스윙바이>가 첫 시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대 어느 계단쯤에서 - 부정일  (0) 2019.12.01
흰 나비 도로를 가로지르고 - 노태맹  (0) 2019.12.01
시소를 생각함 - 김창균  (0) 2019.11.30
그들의 계획 - 안시아  (0) 2019.11.29
아름다운 날 - 육근상  (0) 2019.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