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승의 일 - 박지웅

마루안 2019. 11. 27. 22:40



이승의 일 - 박지웅


사람을 먹고 자라는 상상의 동물을 오해라고 부르자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비웃는 이 두려운 동물은 오히려 해명의 말을 먹으면 몸집을 부풀리는데
그렇다 해서 침묵을 먹이로 던지는 것은 더 위험하다
시선을 피하거나 갑자기 몸을 기울여 다가가는 행위는 삼갈 것
잡아당길수록 단단히 묶이는 이 악령의 흉학한 문제를 받은 자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견디는 일이 얼마나 무참한지를
적당한 때 발 빼는 것이 얼마나 현명한지를 배울 것이다
부쩍 수척해진 희망과 어깨를 걸고 술집으로 향하는 나날들
저 수렁의 동물을 설명할 길은 끝도 없으나
문틈으로 눈 넣고 우리를 지켜보는 겨울이 오고
두서없는 말은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꺼내지 않기로 하자, 상상 속의 동물을 그만 이해하기로 하자
이승에서 태어나 맺은 이승의 일들을 억지로 갈라놓지 말기로 하자
누구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 말을 허락하기까지 얼마나 몸서리쳤는가, 나는 또 너는



*시집,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문예중앙








야설 - 박지웅



폭설이 술집을 덮치고 있다 창가에 등 굽히고 야설을 읽던 사내 깜빡 잠든다
비틀거리는 사내를 야설이 조용히 따라나선다
사내는 이런 밤에 피해야 할 조언을 떠올린다 눈 속을 오래 걷지 마라 미궁에 빠진다
길에 몸을 잘못 밀어 넣었다가는 결국 백발이 된 희망과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
그러나 사내는 움직이는 흰 벽 속으로 계속 걸어 들어간다
어차피 아는 길은 없다, 세상은 단 한 번도 같은 길을 내준 적이 없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빠져나가는 세상
무너지고 쌓이는 무수한 사방을 보았다, 그 어디에 의자를 놓고 정착할 수 있단 말인가
독백에 빠진 사내를 마중하는 것은 언제나 미노타우로스의 입, 그 앞에 빠다귀처럼 널린 봄날을 어떻게 추스리겠는가
사내는 몇 번 눈 위에 이름을 쓴 일이 있다
하늘은 몇 번 그 이름을 덮어 지운 적이 있다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삶이 아니었으리라 알면서도 속고 또다시 눈 뜨고 꿈꾸는 것이 삶이라면 삶은 정말 나쁜 버릇이다
창가에 축 늘어진 사내를 어디론가 밀어붙이는 눈발들.....
하늘은 오늘 하늘을 한 점도 남길 생각이 없다